나도 몰랐던 내 취향의 발견, '북큐레이션'의 미래  (하현 작가) 첨부이미지 : 하현.jpg

 

평소보다 늦게 일어났더니 하루가 짧았다. 서울에만 다녀오면 꼭 이렇게 늦잠을 잔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커피를 한 잔 더 마시며 생각했다. 역시 강남은 무리였어. 

나는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할 무렵 경기도 고양시로 이사해 그곳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 20대를 모두 보냈다. 서울은 내게 여러모로 피곤한 도시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먼 것도 아닌데. 어딜 가든 바글바글한 사람들에게 치이고, 고통 같은 대중교통에 시달리다 보면 물리적 거리와는 상관없이 세상의 끝까지 다녀온 기분이 든다.

 

                                                                   ▲ 광화문 교보빌딩 (출처 : 교보문고 홈페이지)

 

이런 내가 서울에서 거의 유일하게 좋아하는 곳은 광화문 일대다. 이유는 하나, 거기 교보문고가 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시절 아빠는 몇 달에 한 번씩 나를 데리고 광화문에 갔다. 버스를 타고 두 시간을 달려 광화문에 도착하면 저 멀리 세종문화회관이 보이는 순간부터 가슴이 설렜다. 우리는 곧장 교보문고가 있는 지하로 내려가 서점 한쪽에 자리 잡은 푸드코트에 갔다. 맛은 없지만 그냥 지나치기는 왠지 아쉬운 우동을 한 그릇씩 비우고 느긋하게 서점을 구경하는 주말 오후. 특별할 것 없는 그 하루가 내게는 여행이나 마찬가지였다.

 

▲ 서점의 책 (출처 : 픽사베이)

동네 도서관보다 큰 서점을 샅샅이 뒤지며 오래오래 책을 골랐다. 읽고 싶은 책은 늘 읽을 수 있는 책보다 많았고, 그래서 서가 앞의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신중해졌다.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 제목이 마음에 드는 책, 표지가 예쁜 책, 띠지에 적힌 문구가 흥미로운 책, 내 또래 아이들이 많이 구경하는 책, 그냥 느낌이 좋은 책……. 

나름의 이유로 후보에 오른 책들을 하나씩 펼쳐보며 그중 대여섯 권을 골랐다. 서점 냄새가 나는 묵직한 쇼핑백을 품에 소중히 껴안고 집으로 돌아오면 어느새 하루가 다 지나 있었다. 나는 외국에 사는 친척이 보내준 귀한 과자를 아껴 먹듯 다시 광화문에 가는 날까지 그 책들을 한 권씩 야금야금 꺼내 읽었다.
 
그렇게 고른 책 중에는 ‘인생 책’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재미있는 것도, 그날의 내 선택을 후회할 만큼 지루한 것도 있었다. 가장 기대했던 책에게 배신 아닌 배신을 당하는 일도 물론 있었다. 그럴 때면 평소보다 크게 실망하곤 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 실망마저도 즐거웠던 것 같다. 그런 과정을 수없이 반복하며 차근차근 나만의 취향을 쌓아 갔다. 

내가 어떤 이야기에 감응하고 어떤 분야에 특별히 관심을 보이는지. 어떤 장르를 좋아하고 어떤 작가를 사랑하는지. 그런 것들을 스스로 깨달을 기회가 삶의 초반에 찾아온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이었는지 한참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큐레이션 서점이나 북 큐레이션 서비스를 찾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읽을 책을 골라준다고? 아니, 도대체 왜? 나에게는 책을 읽는 기쁨만큼이나 고르는 기쁨 역시 컸다. 아무리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이라고 해도 나만큼 나를 잘 알지는 못할 텐데. 나도 종종 헷갈리는 내 취향을 파악해 책을 골라준다는 말이 영 미심쩍게 들렸다. 내가 아는 독서는 당연히 혼자 하는 일이었다. 책과 나 사이에 다른 누군가가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 SNS를 통해 소통하는 작가의 모습 (출처 : 하현 작가 인스타그램)

 

이런 내 생각을 바꾼 건 SNS를 통해 알게 된 책 친구들이었다. 재미있게 읽은 책과 밑줄 그은 문장들을 소개하면 그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선가 나타났다. 누군가와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경험이 내게는 무척 생소했다. 내 주변에는 책을 읽는 친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 권의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우리의 취향이 겹치는 지점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그들이 소개하는 책을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흥미로워 보이는 책을 발견하면 따라 읽기도 했다. 그 책들은 높은 확률로 나에게도 좋은 책이 되었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일종의 큐레이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책과 나 사이에 다른 누군가를 위한 자리를 남겨 놓는 일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그렇게 배웠다.  
책과 나 사이의 다른 누군가. 북 큐레이션은 바로 그런 역할을 한다.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검증된 취향 공유자’가 되어 주는 것. 서점에는 오늘보다 내일 더 많은 책이 깔릴 것이고, 우리는 오늘보다 내일 더 바쁠 것이다. 꼭 출판 시장이 아니더라도 큐레이션 서비스는 생활의 다양한 영역에서 각광받고 있다. 선택은 즐겁지만 그만큼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게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정된 자원인 돈과 시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양질의 선택지를 제공하는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독자들은 앞으로 더욱 많아질 것이다. 수많은 책을 하나하나 펼쳐보며 기대와 실망을 반복하기엔 이 세계는 너무 바쁘게 돌아가니까.

 

▲ 북촌에 위치한 큐레이션 서점 비화림 (출처 : 비화림 인스타그램)

 

절판만 되지 않았다면 거의 모든 책을 구할 수 있는 대형 서점과 다르게 큐레이션 서점에서는 그곳의 선택을 받은 소수의 책들만 만날 수 있다. 하지만 그 제한성 덕분에 오히려 취향의 확장을 경험하기도 한다. 평소 같았다면 그냥 지나쳤을 책에도 눈길이 닿고, 검증된 취향 공유자가 보여주는 세계에서 나도 몰랐던 내 취향을 우연히 발견하기도 한다. 나 역시 큐레이션 서점을 통해 한 번도 관심을 가져 본 적 없었던 SF소설의 재미를 알게 되었다. 

 

각각의 고유한 색을 가진 작은 공간들이 생겨나며 서점 생태계가 다양해지는 것도 반가운 일이다. 서점마다 가장 눈에 띄는 매대에 진열된 책들이 모두 다른 것을 보며 그곳을 찾는 사람들의 취향을 상상해 보는 것도 즐겁다. 취향을 공유하고 확장하는 동안 독서는 세상과 단절된 취미에서 세상과 연결된 취미로 모습을 바꾼다.
 선택지가 너무 많아서 탈이 되는 시대. 북 큐레이션은 다양한 실험을 통해 선택의 즐거움은 남겨 놓고 번거로움은 대신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그 시도가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두고두고 읽고 싶은 책을 발견하는 기쁨을, 단지 베스트셀러가 되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너무 빨리 매대에서 사라진 좋은 책들에게는 다시 발견되는 기쁨을 선사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그리고 나아가 밝은 눈으로 더 좋은 것을 찾아내는 일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내가 기다리는 북 큐레이션의 미래는 이런 것이다.

▲하현 작가의 책들 (출처=교보문고)

 

하현 (작가)

약속이 취소되면 마음속으로 기쁨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
일탈보다 일상에 관심이 많다. 《달의 조각》 《이것이 나의 다정입니다》 《어쩌다 보니 스페인어였습니다》를 썼다. 장래희망은 부유하고 명랑한 독거노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