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콘텐츠 속 한국 전통문화의 자양분 (정덕현 칼럼니스트) 첨부이미지 : 정덕현 평론가.jpg

 

줄광대는 넘어질 듯 넘어지지 않고 떨어질 듯 떨어지지 않는 모습을 의도적으로 연출했다. 그 때마다 그 광경을 보던 관객들은 탄성을 자아내고 깔깔 웃으며 박수를 쳤다. 줄광대는 줄타기만 하는 게 아니었다. 줄 밑에서 매호씨가 해주는 장구 연주에 맞춰 덩실덩실 춤을 췄고, 매호씨와 재담을 주고받으며 관객들을 웃게 만들었다. 관객과의 직접적인 소통도 빠지지 않았다. 어려서 마을 공터에 판을 벌여놓고 남사당패들이 보여주던 공연 중에서도 내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건 바로 이 줄타기였다. 세상에 이렇게 버라이어티한 재미를 주는 공연이 있을까!

 

ⓒ클립아트코리아

 

이준익 감독의 <왕의 남자>의 소재가 됐던 줄타기를 다시 보게 되면서 새삼 이 공연의 대단함을 실감하게 됐다. 거기에는 기예, 춤, 노래, 재담을 모두 포함하는 종합예술로서의 면모들이 갖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필리페 페티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하늘을 걷는 남자>에서처럼, 412미터 높이의 월드 트레이드 센터 빌딩 사이를 줄 하나에 의지해 걸어가는 스펙터클로서의 서구 줄타기와는 확연히 비교되는 것이 남사당패 줄타기였다. 3미터 눈높이에 세워진 줄 위에서 벌어지는 공연이지만, 낮기 때문에 관객들과 함께 호흡해가며 만들어가는 재미와 몰입감은 훨씬 클 수밖에 없었다.

영화<하늘을 걷는 남자> 스틸컷 (출처=네이버영화)

 

남사당패 줄타기의 재미요소들을 대중문화 안에서 발견하게 된 건 KBS <개그콘서트>에서 김병만이 했던 ‘달인’이라는 코너에서였다. 처음에는 하지도 못할 기예를 할 수 있다고 허세를 부리는 콘셉트로 시작했던 코너는, 어느 순간부터 허세가 아닌 진짜 기예를 보여주는 반전으로 변화했다. 그 때부터 웃음의 코드는 저 남사당패 줄타기와 같아졌다. 아슬아슬하게 넘어질 듯 넘어지지 않고 떨어질 듯 떨어지지 않는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면서 만들어내는 웃음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기예적 요소를 섞어 만들어내는 웃음은 논버벌 퍼포먼스 공연의 형태로 해외에서도 각광받았다. 옹알스가 선보인 저글링 등의 기예를 활용한 공연은 대표적인 사례다.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베스트 코미디 위너상을 받기도 했던 이들은 영국 웨스트엔드에서 장기공연을 하기도 했다. 이런 일련의 현상들을 들여다보며 알게 됐다. 현재 국내외에서 주목받는 한국의 대중문화에는 전통문화의 유전자가 깃들어 있다는 것을.

21세기 비틀즈로까지 불리게 된 방탄소년단이나, 아카데미상을 석권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과 여우주연상을 받은 <미나리>의 윤여정 그리고 최근 <킹덤>에서부터 <오징어 게임>으로 이어진 한국드라마 열풍 등등. 한국문화 전반에 대한 전 세계인들의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그런데 이렇게 해외에서 주목받은 K콘텐츠가 가진 매력에는 한국의 전통문화가 중요한 요소들로 자리했다. 예를 들어 방탄소년단이 2018년에 발표해 빌보드차트 핫100 11위를 기록했던 ‘Idol’은 음악과 뮤직비디오에 한국 전통문화의 다양한 요소들을 담아냈다. ‘덩기덕 쿵더러러’ 같은 장단이나 ‘얼쑤’ 같은 추임새를 가사에 담았고, 뮤직비디오에는 개량한복 차림에 북청사자놀음, 봉산탈춤이 방탄소년단의 어깨춤과 절묘하게 어우러졌다. 방탄소년단은 마치 현대판 줄광대처럼 보였다. 팝과 국악,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현실과 가상이라는 양극단의 요소들을 양손에 쥔 채 줄 위에서의 신명난 한판을 벌이고 있는.
 

🔗BTS (방탄소년단) 'IDOL' Official MV

 

 

전통문화가 현재와 섞이고 나아가 글로벌하게 통용되는 보편적 문화들과 결합하는 방식은 현재 이른바 K콘텐츠가 해외에서도 각광받게 된 중요한 요인이다. 때 아닌 ‘갓’ 신드롬을 일으킨 <킹덤>은 글로벌한 장르로서 전 세계인이 보편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좀비 장르’를 조선시대라는 전통적인 시공간을 더함으로써 차별적인 콘텐츠가 되었다. 전통문화라 부르긴 그렇지만 한국적 삶의 방식들이 더해진 콘텐츠들도 마찬가지다.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 ⓒ넷플릭스

 

<기생충>이 양극화된 삶을 블랙코미디 형식으로 담아내면서 은유의 공간으로 활용한 반지하나, <미나리>가 이민자의 끈질긴 생명력을 이야기하며 끄집어낸 한국 할머니의 엉뚱하면서도 따뜻하고 지혜로운 정 같은 한국적 삶의 방식들이 그것이다. 그리고 최근 글로벌 신드롬을 일으킨 <오징어 게임>의 달고나 게임 같은 한국의 놀이문화는 어떤가. 한국만이 가진 문화적 요소들은 보편적 공감대와 더불어 한국의 대중문화에 대해 전 세계인들이 느끼는 독특한 매력으로 부각되고 있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 ⓒ넷플릭스

 

 최근 한국의 대중문화는 로컬의 변방에서 글로벌의 중심으로 들어서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가능해진 건 네트워크를 통해 하나의 지구촌화된 글로벌 콘텐츠 시장에서 요구하는 것이 글로벌한 보편성과 로컬의 차별성을 조화시킨 콘텐츠이기 때문이다. 대륙과 바다를 잇는 반도의 기질이기도 하지만, 워낙 내수시장만으로 생존하기 어려운 환경은 끊임없이 해외의 동향들을 놓치지 않고 따라가면서 동시에 한국만이 가진 전통적인 요소들을 접목시키는 노력을 하게 만들었다. 그것이 생존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전 세계 팝의 본고장인 미국 시장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장르들을 재빠르게 섭렵해 한국화하는 과정을 K팝은 일찍이 시도했고, 전 세계인들의 영상문법이라고 할 수 있는 장르들을 장인 수준으로 만들어내면서 한국이 직면한 현실적 문제들을 장르 안에 구현해내는 영화, 드라마들이 쏟아져 나왔다.

영화<왕의 남자> 한 장면 (출처=네이버영화)

 

그런데 한국의 대중문화가 마치 줄타기를 하듯, 보편적이고 대중적인 장르문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도 동시에 작품성과 예술성을 만들어내며, 나아가 선진적인 수준의 콘텐츠에 한국적 차별성까지 담는 노력까지 하게 된 이유는 뭘까. 그것은 그 어느 나라 보다 더 높은 수준을 요구하고 콘텐츠에 관여하거나 참여하려는 ‘남다른 대중들’에게서 비롯된 것이다.한국인들은 재미만이 아닌 의미까지 담아내라고 요구했고, 세계적 수준의 완성도에 한국적 자존심까지 챙기라 요구했다. 대중들 모두에게 참여의 기회를 제공하는 IT 인프라는 이 요구들을 여론으로까지 만들어 힘을 발휘하게 했다. 그래서 한국의 콘텐츠 제작 환경은 마치 과거 마당에서 줄타기 같은 기예를 하는 연희자들이 관객과 경계 없이 어우러지며 함께 만들어가곤 했던 그 광경을 현대적으로 재연해놓고 있다. 일종의 디지털 마당이 펼쳐져 있다고 해야 할까.

현재 글로벌한 위상을 얻게 된 한국의 대중문화를 보다보면 소재표현 나아가 작업에 참여하는 대중들의 열성까지 전통문화의 자양분이 느껴진다디지털 마당 위에 세워진 줄 위에서 아슬아슬한 경계를 넘나드는 것으로 관객들을 열광하게 하는 줄광대의 비상이 보인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 TV나 영화, 대중음악 같은 대중문화 속에 담겨진 현실을 분석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MBC시청자평가원, JTBC시청자 위원을 역임했고 백상예술대상, 대한민국 예술상 심사위원이다. 각종 방송 활동, 강연 등을 통해 대중문화가 가진 사회적 의미와 가치를 알리고 있으며, 무엇보다 '공감'이라는 키워드로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고 소통하려 노력하고 있다. 저서로 <드라마 속 대사 한 마디가 가슴을 후벼팔 때가 있다>, <다큐처럼 일하고 예능처럼 신나게>, <웃기는 레볼루션(공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