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스포츠, 씨름의 흥망성쇠 (김학수 스포츠 칼럼니스트) 첨부이미지 : 그림3.png

전통스포츠 씨름은 수천년 이어져 온 우리나라의 시대 상황과 사회문화적인 상황을 잘 알게 해주는 스포츠이다. 씨름이 수많은 세대와 세대를 거쳐 내려오면서 시대별로 흥망성쇠의 과정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역사적 상황에 따라 씨름은 흥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한 것이다.
씨름의 이러한 모습은 오래된 신문과 옛 그림 등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현대 씨름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1920년 무렵의 조선일보 기사를 살펴본다.

1920년 6월8일자 조선일보 ‘기우의 대각희 둑도에서 삼일간’ 기사가 실린 본면 ⓒ조선뉴스라이브러리100

 

국내 최고 역사를 자랑하는 조선일보가 창간하던 해인 1920년 6월8일자에 ‘기우(祈雨)의 대각희(大脚戱) 둑도에셔 삼일간’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게재됐다.
 
기사 내용을 보면 현재의 한강 뚝섬에서 심한 가뭄으로 비 오기를 바라는 주민들이 생활형편이 여의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대각희’라 불리기도 하는 샅바씨름대회를 개최했다는 것이다. 당시 씨름은 서민들의 애환을 함께하는 의례행사의 하나로 활용됐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조선시대 김홍도의 ‘씨름’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 후기 천재화가 김홍도의 역작 ‘씨름’은 조선시대 유행하던 세시풍속을 마치 눈앞에서 보는듯한 착각을 불러 오는듯한 묘한 기시감을 갖게 해준다. 이 그림은 단오날, 시장 장터에서 양반, 평민 등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둘러앉아 씨름을 보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 씨름이 최고의 스포츠였음을 한 눈에 알 수 있게 해준다. 코리아헤럴드 문화부 기자와 호암미술관· 국립중앙박물과 학예연구원을 거친 오주석(1956~2005)은 자신의 대표적인 저서 ‘한국의 미 특강’에서 장터에서 벌어지는 씨름 구경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양반과 서민, 아이와 노인 등 여러 계층과 나이를 대비시켜 다양한 시각으로 분석했다. 씨름 장면을 통해 당시 사회의 일상사를 엿보게 해주는 관점을 제공했던 것이다.

두 장사가 씨름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 고구려시대 각저총 고분벽화 ⓒ서울대학교 박물관

 

씨름은 고구려 시대부터 시작된 우리 민족의 운동경기로 알려져 있다. 두 사람이 샅바나 허리춤을 잡고 힘과 기술을 겨루어 상대방을 넘어뜨리는 경기인데 여러 씨름으로 추정되는 그림들이 고구려 시대부터 알려져 있다. 고고학적으로 씨름에 관한 정확한 기원과 모습은 아직도 확인되지 않았지만 고구려 벽화에서 이러한 모습들을 볼 수 있다. 씨름이 우리 고대 민족들 사이에서도 크게 유행한 스포츠였다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일본 학계에선 일본 스모가 고구려에서 기원한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씨름은 터키, 몽골 등에도 존재해 고구려인들에게서 퍼져나간 설도 존재한다. 일본 스모, 몽골(베흐)과 터키 씨름이 우리 씨름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씨름은 각종 기록을 통해 역사를 대략적으로 알 수 있다. 긴 역사만큼이나 씨름은 다양한 이름이 있다. 주로 각저(角抵)·각희(角戱)·상박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러다 15세기 이후로 '실훔'에서 '실홈'을 거쳐 '씨름'이 되었다. 역사서에 쓰여진 씨름에 관한 기록은 조선 세종 때 제작된 ‘고려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1419년 6월 15일 태종과 세종이 각력희를 강변에서 보았다고 전한다. 1430년 12월 상총이라는 스님이 씨름을 하다가 상대방이 죽게 되었는데, 나라에서는 관대하게 죄를 묻지 않았다고도 한다. 1664년 5월 씨름 경기에서 이기지 못하여 상대방을 칼로 찔러 죽였다는 기록도 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도 씨름을 하거나 구경했다는 기록이 있다.

현대로 내려와서는 씨름은 1920년대 전성기를 맞는다. 일제의 강압적인 지배를 받으면서도 전통적으로 내려온 민속스포츠인 씨름은 서민들 사이에서 맥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갔다. 각종 마을 행사나 제례 때 씨름을 통해 일체감을 가지며 서로간의 정을 주고 받았다고 한다. 일제시대에 씨름 대회는 개최와 중단을 거듭했다. 1927년 조선 씨름 협회가 창단되면서 1927년 제1회 전조선 씨름 대회를 개최하였으나 1934년 11월 제 6회 대회로 중단되었다. 2년후인 1936년 조선 씨름 협회에서 다시 제1회 전조선 씨름 선수권 대회를 개최하였으나 이 대회도 제6회 대회를 마친 후 중단되었다가 1946년 대한씨름협회로 협회 명칭을 바꾸며 다시 재건을 보게 되어 1947년 전국 씨름 선수권 대회가 7회 부터 계속되기 시작하였다.

 

(좌)1985년 천하장사대회에서 우승한 이만기, (우)1990년 천하장사 씨름대회에서 우승한 강호동 (출처=정책주간지 공감)

 

씨름이 본격적으로 각광을 받게 된 것은 1983년 민속씨름을 출범하면서부터였다. 1983년 4월 13일부터 17일까지 장충체육관에서 개최된 제1회 천하장사 씨름대회를 계기로 씨름 중흥의 장이 열렸다. 특히 1회 대회는 천하장사인 이만기라는 최고 스타가 탄생하면서 국민 스포츠로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당시 씨름은 최고 인기 프로스포츠였다. 야구, 축구 등이 결코 부럽지 않았다. 이만기, 이봉걸, 이준희 등 이른바 트로이카 체제가 만들어지면서 씨름은 큰 인기를 모았다. 이들을 이어 강호동, 이태현, 최홍만 등이 개성 있는 스타일로 많은 관심을 끌었다. 최고의 명절스포츠로 자리잡은 씨름은 전통 한복을 입고 경기를 관전하는 스포츠로 자리를 잡아나가는 듯했다
 
 
하지만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로 된서리를 맞은 씨름은 여러 프로씨름단이 해체되고 유망주들이 떠나면서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프로씨름계가 철퇴를 맞고 씨름계의 파벌싸움까지 겹치며 씨름은 대중들로부터 외면을 받게 됐다. 2000년 이후 씨름은 더 이상 반전의 기회를 만들지 못했다. 서울 등 수도권에서 대회를 열지 못하고 지방으로 전전하는 ‘유랑극단’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다.

2019년 방영됐던 스포츠예능 <씨름의 희열> ⓒKBS

 
현재 씨름은 변변한 전용 체육관 하나 갖고 있지 않다. 대중들은 명절 때에나 TV를 접하고 있을 정도이다. 씨름이 전통 스포츠로 다시 사랑을 받기 위해선 씨름인들이 수천 년의 역사를 거쳐 이어 내려온 전통 회복을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김학수
오랫동안 체육 현장을 취재했다. 한국체대 초빙교수를 10여년간 지냈으며 한양대, 서강대 등에서 스포츠 저널리즘 강의를 했다.
지난 13년간 스포츠 이야기를 다룬 기명 칼럼 ‘스포츠 속으로’를 매주 거르지 않고 쓰고 있다. 현재 스포츠 전문 인터넷 매체 ‘마니아타임즈’ 편집국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