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보물섬을 향해(하현 작가) 첨부이미지 : 썸네일9-2.png

오전 7시 반, 새로운 아침이 밝았음을 알리는 핸드폰 알람이 울린다. 저 방정맞은 멜로디는 아무리 들어도 정이 안 붙는단 말이야. 비척비척 일어나 알람을 끄고 세수를 한 뒤 미지근한 물 한 잔과 함께 유산균을 삼키며 하루를 시작…… 한다면 정말 좋겠지만 그건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 현실의 나는 안락한 침대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스르륵 남은 잠에 빠져든다.

10분 뒤, 두 번째 알람이 울린다. 눈을 감은 채로 팔을 뻗어 이불 속 어딘가에 숨어 있는 핸드폰을 찾는다. 괜찮아, 아직 조금 더 자도 돼. 잠에 취한 나는 한없이 너그럽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그러다 보면 다시 10분 뒤, 더는 괜찮지 않은 시간이다. 뭐라도 먹고 나가려면 이제 진짜 일어나야 하는데…….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잠보다 달콤한 건 세상 어디에도 없다.

나는 마포구 망원동의 한 서점에서 근무한다. 김포 끝자락 우리 집에서 서점까지는 넉넉잡아 두 시간 정도. 물 한 모금 겨우 마신 빈속으로 김포골드라인과 공항철도와 6호선을 갈아타고 망원역에 도착하면 참을 수 없는 허기가 밀려와 눈앞이 아득해진다. 10분만 일찍 일어났으면 미숫가루라도 한 잔 마시고 나왔을 텐데. 뒤늦은 후회를 하며 마지막 남은 힘을 모아 발걸음을 재촉한다. 이름만 들어도 입 안 가득 침이 고이는 곳, 나의 보물섬을 향해.
 
망원역 2번 출구로 나와 망원시장 골목으로 쭉 직진하다 보면 하얀 바탕에 검은색으로 정직하게 쓰여진 ‘보물섬 김밥’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보물섬 김밥이라니, 가게 이름이 특이하네. 그곳에 대한 감상은 그게 전부였다. 역 근처 큰길에는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커다란 프랜차이즈 분식집이 있었고, 가끔 김밥이 먹고 싶을 때면 당연하게 그곳으로 갔다. 김밥이 다 거기서 거기지, 뭐. 그때까지만 해도 내게 김밥은 그런 음식이었다.

무심하게 지나쳤던 보물섬 김밥이 망원동 명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우연히 발견한 누군가의 SNS 게시물을 통해서였다. 유부와 우엉이 빈틈없이 꽉 들어찬 사진 속 김밥은 한눈에 보기에도 맛집의 기운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흥미로운 건 사진 밑에 있는 짧은 글이었다. “눈치 안 보고 마음껏 편식할 수 있는 곳.” 응? 뭐라고? 조금 더 검색해 보니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주문할 때 싫어하는 재료나 먹을 수 없는 재료를 말하면 그걸 빼고 다른 재료를 더 넣어서 김밥을 만들어 주는 모양이었다. 이 시스템이 무척 마음에 들었던 나는 그곳에 가보기로 했다.

싫어하는 재료가 있으면 미리 말씀해달라는 문구가 있는 메뉴판 (사진 제공=하현)

점심때가 가까워질 무렵이라서 그런지 가게 앞에는 이미 몇 사람이 서 있었다. 내부는 생각보다 넓었지만 포장 전문점이라서 먹고 갈 수 있는 테이블은 따로 없었다. 야채김밥 한 줄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에도 손님은 계속 왔다. “치즈김밥 두 줄이요.” “보물섬 하나랑 와사비참치 하나 주세요.” 간결한 주문이 이어지는 가운데 우엉 뺀 야채김밥이나 비건 김밥을 주문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쿠킹호일로 돌돌 감싼 따끈한 김밥을 받아들고 서점으로 향했다. 우엉과 당근, 달걀과 햄이 듬뿍 들어간 야채김밥은 흠 잡을 데 없이 완벽한 맛이었다. 요리조리 살펴봐도 특별할 게 없는데 오히려 그래서 더 특별했다.

비건 김밥이 있는 메뉴판 (사진 제공=하현)

보물섬 김밥은 그렇게 나의 참새 방앗간이 되었다. 가장 즐겨 먹는 메뉴는 야채김밥이지만 기분에 따라 유부김밥이나 참치김밥으로 변화를 주기도 한다. “김밥에 싫어하는 재료가 있으면 미리 말씀해주세요.” “비건김밥 드시는 분들은 미리 말씀 부탁드립니다.” 가게 곳곳에는 이런 안내문이 붙어 있다. 당근도 우엉도 시금치도 잘 먹는 나는 아무것도 빼지 않지만 그럼에도 이 세심한 배려가 무척이나 다정하게 느껴진다.

자주 먹는 보물섬김밥(사진 제공=하현)

이곳에서는 무언가를 먹지 않거나 먹지 못하는 게 잘못이 되지 않는다. 굳이 핑계를 만들거나 이유를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저 좋아하는 걸 맛있게 먹으면 된다. 메뉴판에 적혀 있는 김밥은 모두 열 종류. 하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김밥이 사장님의 손끝에서 매일 만들어질 것이다. 깻잎이 들어가지 않은 참치김밥이나 달걀과 햄을 뺀 김치김밥, 우엉 대신 당근을 듬뿍 넣은 야채김밥 같은 것들이. 내가 만약 유치원을 짓는다면 보물섬 김밥 사장님을 냠냠 선생님으로 모시고 싶다. 서로 다른 입맛과 식성을 관찰하며 아이들은 식탁 앞에서 조금 더 다양한 세계를 만나게 되겠지.

유부와 우엉이 들어간 시그니처 메뉴 ‘보물섬김밥’을 주문하면 사장님은 “보물이요!”라는 말과 함께 김밥을 건네준다. 한 줄의 김밥을 통해 취향을 온전히 존중받는 경험. 이곳에 숨어 있는 진짜 보물이 무엇인지 이제 나는 안다.
 


하현
김포와 망원과 일산을 오가며 책을 쓰고, 책을 팔고, 책을 읽는다. 《좋았던 것들이 하나씩 시시해져도》 《우리 세계의 모든 말》 《달의 조각》 등을 썼다. 장래희망은 부유하고 명랑한 독거노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