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주거의 키워드 (황두진 건축가) 첨부이미지 : 썸네일12-2.png

대학 시절, ‘미래’라는 단어에 대한 국가별 어감의 차이를 경험한 적이 있다. 나의 경우 태어나 보니 빈곤 국가였는데, 내가 성장기에 접어들 무렵 나라도 비슷한 시기를 맞았다. 연 평균 두 자리 숫자 성장률이 다반사였다. 취직 걱정은 없었고 내 세대는 당연히 부모 세대보다 잘 살게 될 것이라 믿었다. 나에게 미래란 1968에 개봉한 스탠리 큐브릭의 공상과학 영화인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장면들처럼 매끄럽고 반짝반짝한 것이었다. 하루에 캡슐 하나 정도 먹는 것으로 식사도 충분히 될 것이라 믿었다. 우리 세대가 겪은 최초의 집단적인 좌절은 1997년의 이른바 ‘IMF 사태’였는데, 유학은 그 이전이었으므로 이러한 나의 낙관적 미래관은 손상 없이 유지되고 있었다.

영화<2001:스페이스오디세이>포스터 (출처=네이버영화)

 

학교에서 만난 미국 및 유럽 친구들의 미래관은 달랐다. 그들에게 미래란 ‘먼지 낀 현재’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도시 안팎에 널려있는 폐허가 된 공장, 폐쇄된 항구, 문 닫은 가게 등을 마치 건축 역사책에 나오는 고대의 유적처럼 경외감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었다. 당시 미국 경제는 형편없어서, 동경을 팔면 미국을 살 수 있다고 했다. 펜실베이니아 철강 지역 출신의 한 친구는 나에게 ‘너희 나라에 포항제철이라고 있지?’라고 물으며 그 회사로 인해 자기 일가 어른들이 모두 직장을 잃고 뿔뿔이 흩어졌다고 말했다. 그들은 이미 도시의 죽음을 겪어봤다. 1961년에 출간된, 지금도 도시에 대한 명저로 평가 받는 제인 제이콥스의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에서 ‘죽음’이 ‘삶’보다 앞에 나왔던 이유이기도 하다.

도서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 (출처=YES24)

 

관점을 지금으로 옮겨 보면, IMF 사태를 포함한 일련의 경제위기를 겪었고 고도성장 시대도 지나간 지금의 한국에서 유학시절의 나처럼 순진한 미래관을 갖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물론 소수의 예외는 항상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렇다고 당시 미국인들의 암울한 미래관을 받아들이기에 아직 우리는 한 시대 패러다임의 종말을 그 정도로 경험해 본 적이 없다. 조금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이제부터 막 겪으려는 단계가 아닌가 한다. 축소 도시, 지방 소멸 등의 단어가 이미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즉 관점을 한국인의 ‘현실적 미래’ 정도에 맞추고 이에 합당한 ‘보통 사람들의 새로운 주거관’을 이야기하자면 그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 그것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의 키워드로 설명하고자 한다.

우선 ‘복합’이다. 주거는 사회 속에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한다. 그 중에서
단독주택, 다세대, 다가구, 연립, 아파트 등은 주거가 단일 기능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복합은 주거가 다른 도시 기능과 섞여있는 것을 말한다. 상가주택, 상가아파트, 주상복합 등이 그것이며, 필자가 오래 전부터 주장해오고 있는 ‘무지개떡 건축’ 또한 이러한 범주에 들어간다. 주거가 복합적으로 존재해야 하는 필요성은 궁극적으로 이동 거리를 단축시키기 위한 것이다. 즉 직주근접의 방법론 중 하나다. 이동 거리의 단축은 곧 시간의 절약이며 나아가 에너지의 절약이고 탄소 발자국을 줄이는 것이기도 하다. 그 효과는 중소 도시에서보다 대도시에서 훨씬 크다. 어쩌다 장거리를 이동하는 것은 큰 문제가 없으나 매일의 일상에서 반복되는 이동 거리를 단축하는 것은 개인의 삶은 물론, 사회적으로도 절실한 과제다.

1970년대에 건축된 숭인상가아파트 전경 ⓒ황두진

 

다음으로는 ‘축소’다. 안타깝지만 노령사회가 될수록, 에너지 문제가 심각해질수록, 도시화가
진행될수록 ‘축소’는 피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암울해 할 필요는 없다. 개인의 입장에서 축소된 주거는 비용이나 유지관리 측면에서 그 만큼 삶의 무게를 덜어주는 것이기도 하다. 집에서 누리지 못하는 것들은 집 밖의 도시에서 즐기면 된다. 공원, 산책로, 도서관, 문화 시설, 학교 등 공공적 인프라 뿐 아니라 카페, 레스토랑, 클럽, 회사 등 상업적 인프라의 중요성이 갈수록 강조되는 이유다. 고도 성장기에는 수많은 도시 기능들이 주거로 편입되어 홈 바(bar), 홈 짐(gym) 등이 유행했으나 이제 다시 도시로 빠져나가는 중이다. 다만 홈 오피스는 예외적으로 앞으로도 주거의 중요한 부분으로 남아 있을 것으로 조심스럽게 전망한다. 솔직히 현대인은 일을 많이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 ‘일’이란 꼭 직업과 관련된 것만이 아니라 삶과 관련된 다양한 종류의 것들을 통칭한다.

ⓒ클립아트코리아

 

세 번째는 ‘가변’이다. 축소된 주거라고 해서 좁게 살라는 법은 없다. 아무리 넓은 집이라고 해도 방의 개수를 늘리고 칸을 많이 나누면 좁은 집에 사는 것이다. 반대의 전략은 어떨까. 가급적 공간을 적게 구획하여 결과적으로 큰 공간을 누리는, 이른바 ‘원룸 전략’이다. 나아가 자리를 많이 차지하는 물건들을 이동과 수납이 쉽게 가능하도록 경량화한다면? 예를 들어 침대 하나만 없애도 공간의 가변성은 그만큼 늘어난다. 이미 유튜브에는 이러한 가변 공간의 노하우를 소개하는 동영상이 엄청나게 올라오고 있다. 게다가 한국인에게는 한옥에서의 삶에 대한 문화적 유전자가 아직 남아있다. 한옥이야말로 밥상을 깔면 식당, 책상을 놓으면 공부방, 이부자리를 깔면 침실이 아니던가. 게다가 다양하게 열리고 닫히는 문을 이용하면 좁은 집을 넓게 사용할 수도 있다. 이제 그 지혜를 총동원할 때다. 이른바 ‘카멜레온 건축’이다.

ⓒ클립아트코리아

 

마지막으로 ‘공유’가 있다. 이전의 공유는 마치 공산주의와 같은 어감이어서 울타리 안팎의 경계가 명확한 기성세대로 갈수록 부정적인 인식이 강했다. 지금의 공유는 문화적 맥락이 다르다. 나눌수록 커지고 윤택해지는 삶의 지혜 같은 것이다. 주방에서 자동차, 사무실에서 주거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에서 공유의 경험은 꾸준히 축적되어왔고 그 수준도 이전과는 다르다. 마지못해 하는 공유가 아니라 더 좋은 것을 누리기 위한 공유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 써 놓고 보면 이 모든 것과 완전히 반대되는 기존의 개념이 하나 떠오른다. 바로 대형 평수의 단지형 아파트다. 원래 단지형 아파트란 전원적 유형인데 이것이 한국 사회에서 도시형 주거의 우점종이 된 것은 관련 법규를 포함한 여러 요인들의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일어난 결과다. 그리고 현재의 어마어마한 존재감에도 불구하고 그 사회적 유효기간은 점점 소멸되어 가는 중이다. 우리 사회와 도시는 더 이상 이런 반-도시적 주거 문화를 감당할 수 없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혁신이 필요한 부분은 바로 주거다.

 

황두진
황두진은 황두진건축사사무소(www.djharch.com)
 대표인 건축가이면서 여러 권의 단행본을 펴내고 일간지 등 다양한 매체에 꾸준히 기고하고 있는 작가이
기도 하다. 역사와 문화에 대한 꾸준한 관심과 섬세한 관찰력이 그의 일관된 특성이다. 최근 2021년 한국건축
역사학회 작품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