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게시물은 ‘K-컬처의 다양성’을 주제로 외부 전문가가 작성한 칼럼입니다.
나는 버니즈다. 버니즈는 뉴진스의 팬을 의미하는 단어다. 문화다양성 이야기를 해야하는 칼럼에서 나는 또 뉴진스 이야기를 하고 있다. 어쩔 도리 없다. 나는 지난여름 데뷔한 이 걸그룹에게 완전히 빠져있다. 좀 신기한 일이긴 하다. 나는 단 한 번도 아이돌 덕질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다. 물론 군대 일병 시절 데뷔한 S.E.S에 빠져든 경험이 있긴 하다. 하지만 군대란 그런 곳이다. 할 일이 별로 없기 때문에 모든 엔터테인먼트는 내무반에 있는 티브이 화면에서 나온다.
제공=어도어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뉴진스만 열렬히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아이브도 좋아하고 (여자)아이들도 좋아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다. 4세대 걸그룹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 중에서는 이렇게 불평하고 있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다. “3세대 걸그룹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내가 지금 4세대 걸그룹에 대한 이야기를 읽어야 해?” 나는 당신의 불평을 존중한다. 하지만 아는 것은 힘이다. 이 지면을 통해서라도 걸그룹의 역사를 대충 파악하는 것은 꽤 도움이 될 것이다.
간단하게 정리해보자. 1세대 걸그룹은 S.E.S와 핑클이다. 2세대 걸그룹은 소녀시대, 원더걸스와 2NE1이다. 3세대 걸그룹은 블랙핑크, 트와이스, 레드벨벳이다. 이 정도만 알면 당신도 걸그룹의 역사에 대해서 충분히 아는 척할 수 있다. 그런데 1, 2, 3세대 걸그룹에 환호하지 않았던 나는 대체 왜 4세대 걸그룹에 빠져들게 된 걸까. 나는 그 이유를 ‘태도'에서 찾을 생각이다. 영어로 ‘애티튜드'라고 말하면 더욱 근사하게 들리는 바로 그것 말이다.
걸그룹은 언제나 사랑을 노래했다. 그건 하나도 잘못된 게 없다. 대부분의 가요와 팝 음악은 사랑에 대해 노래한다. 사랑이 빠진다면 음악이라는 것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창가에서 세레나데를 부르던 중세부터 사랑은 언제나 음악의 가장 간절한 주제였고, 그건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다. 1세대 걸그룹도 사랑 노래를 불렀다. 4세대 걸그룹도 사랑 노래를 부른다. 그런데 나는 아이브와 뉴진스의 노래를 반복적으로 듣던 어느 날 뭔가가 바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같은 사랑 노래를 하고 있지만 태도가 달랐다.
제공=SM엔터테인먼트, JYP엔터테인먼트
1세대 걸그룹 S.E.S는 “나는 당신의 소녀”라며 “오직 너를 위해 살고 싶다"고 사랑스럽게 노래했다. 핑클은 “너를 반하게 할 생각에 난생처음 치마도 입었어”라며 애교를 부렸다. 2세대라고 달라진 건 별로 없었다. 소녀시대는 “그대와 발을 맞추어 걷고, 사랑해 행복만 줄게요"라고 노래했다. 원더걸스는 “네가 날 혹시 안 좋아할까 봐, 혼자 얼마나 애태운지 몰라"라고 외쳤다. 그 시절 소녀들은 인생의 모든 행복이 남자친구의 마음에 달려있는 것처럼 노래했다. 그 시절에는 누구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소년은 능동적인 사랑을 노래하고, 소녀는 수동적인 사랑을 노래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조금 달라지기 시작한 건 3세대 걸그룹부터다. 블랙핑크가 등장하자 새로운 단어가 생겨났다. ‘걸 크러시'다. 나는 블랙핑크가 “우리 사랑은 불장난"이라고 노래하는 순간 걸그룹의 트렌드가 슬그머니 바뀌기 시작했다는 걸 깨달았다. 예전과 같은 태도는 같은 소녀팬들에게 더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3세대 걸그룹 트와이스의
(좌)트와이스 (제공=JYP엔터테인먼트),(우)블랙핑크 (출처='불장난' 뮤직비디오 캡처)
나는 여기서 4세대 걸그룹이 무슨 혁명적인 변화를 불러왔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뉴진스와 아이브는 어떤 면에서는 블랙핑크보다 훨씬 더 소녀답다. 소녀답다는 표현이 어떤 독자들에게는 구시대적 표현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을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건 뒷걸음질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뉴진스는 사랑스럽게 웃으면서도 “날 믿어봐 한번. I’m not looking for just fun(나는 그냥 재미를 찾는 게 아니야)”라고 노래한다. 아이브는 예쁘게 윙크를 보내면서도 “방금 내가 말한 감정 감히 의심하지 마. 그냥 좋다는 게 아냐”라고 노래한다. 4세대의 소녀들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다. 사랑 노래를 부르면서도 사랑에 모든 것을 희생할 생각은 없다. 소년에게도 소녀에게도 사랑은 놀이다. 쟁취하는 것이다. 어쩌면 4세대 걸그룹은 고전적인 걸그룹과 ‘걸 크러시'의 유행 사이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낸 걸지도 모른다. 동시에 우리는 해외팬들에게 번역된 가사를 내밀면서도 전혀 민망해할 필요가 없는 시대를 마침내 맞이한 것이다.
(좌) 아이브(제공=스타쉽엔터테인먼트), (우)뉴진스(제공=어도어)
그러니 나는 걸그룹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당신에게 제의하고 싶다. 바로 지금이다. 바로 지금이 지나치게 애교떨고 새침 떠는 가사에 진절머리 치지 않고도 걸그룹 덕질을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기다. 만약 당신이 언젠가 있을 뉴진스의 첫 번째 단독 콘서트에서 나를 발견한다면 반갑게 아는 척을 해주시길 부탁드린다. 아재팬이라면 더욱 좋다. 팬은 다양할수록 좋은 법이다.
김도훈
작가 겸 대중문화평론가. 고양이 키우는 남자.
영화전문지와 패션지의 기자로 경력을 쌓았고
현재는 허핑턴포스트코리아의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장르를 넘나들며 다양한 분야의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