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다양성 주제 중 식문화의 '가치소비'를 주제로 한 외부 전문가 칼럼입니다.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을 수석으로 졸업할 정도로 명석한 두뇌를 갖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자폐 스펙트럼을 지닌 신입 변호사 우영우의 대형 로펌 생존기를 담은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극중에서 우영우는 늘 김밥을 먹는다. 로펌 대표와 함께 고급식당에서 회식을 할 때도, 다양한 메뉴가 나오는 구내식당에 가서도 그녀 앞에는 언제나 김밥이 놓여 있다.
아버지도 김밥 가게를 운영하는데, 우영우는 김밥이 지겹지 않은가 보다. 아마 우영우에게 김밥은 가장 마음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익숙한 음식이리라. 늘 그의 곁에 묵묵히 서 있는 아버지처럼. 우리는 우영우의 ‘편식’을 불편하게 바라보지 않는다. 그것은 그의 취향이자 습관이고, 중시하는 가치이며, 선택이기에.
늘 김밥을 먹는 우영우의 모습 ⓒENA
우영우의 김밥이 존중되어야 하듯, 우리 일상에서 마주하는 주변인들의 다양한 식습관 또한 침범되어서는 안 된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첨예하게 의견이 갈리는 주제 중 하나인 정치. 암만 그래도 우리는 정치적인 견해가 정반대인 사람을 겉으로 대놓고 적대시하지 않는다. 마음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든지 간에, 의견의 차이를 인정하고 상대방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학습’하며 얻게 된 최소한의 ‘교양’이다. 10여 년 전만 해도 프랑스에서 빌린 용어(tolerance·관용)까지 동원해야 했던 것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매일 숨 쉬듯 해야 하는 활동인 ‘먹는 문제’에서만큼은 아직까지도 ‘톨레랑스’가 요원한 상황이다. 최근 식문화에서 가치소비가 부상하는 첫 번째 맥락은 바로 이 부분에 기인한다. 가치소비란 자신만의 기준 아래 가치가 높게 설정된 대상에 과감히 지갑은 여는 경향을 가리킨다. 전통적인 의미의 ‘경제적 효용’과는 결이 분명 다르다. 그렇다고 소비를 통한 ‘효용’에 무심하다고 볼 수만은 없다. 가치관에 부합하는 사회적, 정서적 효용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합리적 소비’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도 더러 있지만, 가치소비를 즐기는 이들에겐 자신의 기호와 철학을 녹여내는 이 구매과정을 보다 더 ‘합리적’이라 생각할 공산이 크다. 소비행위를 바라보는 렌즈가 다른 것이다.
‘식(食)’에 대한 관점의 차이. 대표적인 화두는 채식이다. 아직도 채식주의자들은 “착한 척한다”며 비아냥을 듣곤 한다. 채식주의에 다양한 갈래가 있음에도 “왜 이거는 먹으면서 저거는 먹으면 안 되느냐”라는 등의 언어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이들에겐 ‘해방구’가 필요하다. 최근 들어 이들의 섭생 자치권이 보장되는 영토가 늘어나고 있다.
도서<불완전 채식주의자>, 정진아(2022),허밍버드
필자는 “세상에는 한 명의 완전 채식주의자보다 열 명의 불완전 채식주의자가 더 필요하다”는 정진아 작가의 언설을 신봉하는 지인과 강남 모처에 위치한 ‘해방구’를 찾은 적이 있다. ‘우리를 위한 비건’이라는 뜻을 지닌 가게였다. 실제로 동물성 식재료를 사용하지 않는 곳이다. 비건 번, 비건 패티, 볶은 버섯 등으로 만든 햄버거와 그릴드 배지 뇨끼를 주문했다.
▲ 비건 번, 비건 패티, 볶은 버섯 등으로 만든 햄버거 (제공=김민석)
이곳에서는 냅킨과 빨대부터 남달랐다. 한번 쓰고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재사용이 가능했다. 냅킨은 빨아서 다시 쓸 수 있었고, 빨대는 유리나 스테인리스 재질이었다. 지속 가능함으로 손을 닦고, 지속 가능함으로 식사를 맞이했다. 가게 2층에는 ‘제로 웨이스트 샵(Zero Waste Shop)’이라는 특별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제로 웨이스트’라는 구호에 맞게, 지구를 지키는 작은 습관을 자연스레 체득할 수 있었다. 말린 우유팩 수거함이 인상적이었다. 이렇듯 가치소비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소비의 시작과 끝을 연결해주는 과정상의 가치로움과 유기적인 내러티브이다.
채식이라는 ‘기호’가 하나의 ‘운동’이자 ‘주장’으로, 더 나아가서 ‘일상’으로 확대되는 연장선의 한복판에 서 본 값있는 경험이었다. 이 식당은 서초동 지하철역 인근에 자리하고 있다. 식문화의 다양성은 온라인 공간이나 신문 지면에서만 이론적으로 박제되는 것이 아닌, 이렇듯 우리 주변에서 쉬이 인정받을 때 더욱 의미를 가질 것이다. 이런 공간의 존재 자체가 채식에 대한 심리적 진입장벽을 낮춰주는 효과도 있다.
가치소비가 부상하는 두 번째 맥락은 지속가능성에 대한 신념 혹은 ESG이다. CJ제일제당은 2022년의 주요 식문화 키워드 중 하나로 지속가능성(ESG)을 꼽았다. 개인의 식습관이나 취향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관용을 넘어 일종의 사회적, 공익적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깨진 쌀이나 콩비지와 같이 버려지는 것이 당연했던 식품 부산물이 친환경 제품으로 거듭나는 ‘푸드 업사이클링’은 이런 논의와 맥이 닿아 있다.
대체육도 그렇다. 말 그대로 고기를 ‘대체’한다는 것. 스타필드 코엑스몰에는 ‘플랜튜드’라는 이채로운 이름의 레스토랑이 있다. ‘플랜트(Plant)’와 ‘애티튜드(Attitude)’의 합성어다. 필자는 굉장히 잘 만들어진 네이밍이라고 생각한다. 가치소비를 꿰뚫는 핵심어가 ‘태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비건 레스토랑에서 판매되는 콩고기를 간장 베이스로 양념하여 볶은 덮밥 (제공=김민석)
음식을 바라보는 태도, 타인을 존중하는 태도, 지구를 생각하는 태도가 온전히 보장되고, 더 나아가서 그것을 지향하는 식당이다. 풀무원의 급식·외식 운영 자회사인 풀무원푸드앤컬처가 조성한 이 공간에는 이런 ‘태도’를 중시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비건표준인증원으로부터 인증을 받았고, 오픈 키친 형태를 띠고 있어 조리과정을 지켜볼 수 있다. 비건부터 논비건까지, 그 외 플렉시테리언 등 다양한 층위의 입맛을 고루 아우를 수 있다. 콩고기를 간장 베이스로 양념하여 볶은 덮밥은 여느 불고기덮밥 못지않았다.
대체육은 기존의 식문화 트렌드에 조금씩 균열을 내고 있다. 불과 8년 뒤 세계 육류시장에서 대체육의 비중이 육 할에 달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이러다 대체육이 정말 우리의 입맛을 ‘대체’해버릴지도 모르겠다. 한국무역협회 국제통상연구원은 세계 대체육 식품 소비가 2030년 6500만톤, 2035년 9700만톤까지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국내 식물성 대체식품 시장 규모가 2017년부터 연평균 약 15.7%씩 성장해 2026년엔 약 2624억원에 달할 것으로 내다봤다. 미국 시장조사 업체 CFRA는 2030년까지 대체육 시장이 1000억 달러 규모까지 급성장할 것이라 분석하기도 했다. 이는 한화로 무려 131조원이 넘는 어마어마한 수치다.
동물권과 환경보호에 대한 문제의식도 빼놓을 수 없다. ‘먹는 문제’ 그 이상의 담론인 것이다.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는 “공장식 축산은 인류 역사상 최악의 범죄 중 하나”라고 지적한 바 있다. 영화 <카우스피라시(COWSPIRACY)>도 공장식 축산 경영의 문제점을 통렬하게 꼬집었다. 에코브리티(Eco+Celebrity)로 유명한 영화배우이자 환경운동가인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이 영화의 제작에 참여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는 빌 게이츠가 ‘음식의 미래’를 경험했다고 상찬한 바 있는 미국 대체육 브랜드 ‘비욘드 미트(Beyond Meat)’에 투자하기도 했다.
다큐멘터리 영화<카우스피라시> (출처=넷플릭스)
최근 네덜란드에서는 식물성 고기가 동물성 고기보다 가격이 낮아졌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비건 제품을 고르는 데 ‘가격’이 더 이상 장벽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작지 않은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앞으로 기존의 육류 제품은 대체육과 맛, 건강, 가격 등에서 치열한 경쟁을 펼치게 될 것이다.
가치소비를 추동하는 마지막 요소는 ‘재미’다. 헬시플레저(Healthy Pleasure)와 에코그래머블(Eco-grammable)! 전자는 말 그대로 건강 관리를 즐겁게 한다는 의미다. 이전에는 수도승 같은 마음으로 기본적인 욕구를 포기하고 절제하는 방식에 치중했다면, 이제는 건강을 관리하는 과정에서도 즐거움에 방점을 찍고자 하는 것이다. 유쾌함이 동반되어야 건강 관리도 지속 가능하기에!
또 ‘에코(Eco)’와 ‘인스타그래머블(Instagrammable)’을 합친 신조어인 에코그래머블은 말 그대로 인스타그램에 올릴 만한 눈에 띄는 친환경 콘텐츠를 가리킨다. 매력적인 스토리텔링이 뒷받침되어야 인상적인 해시태그를 달 수 있다. MZ세대는 가치소비도, 환경보호도 ‘힙하게’ 즐긴다. 이때 친환경 메시지의 전파와 공유는 친구들의 동참을 유도하는 ‘놀이’가 된다. 놀이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재미있으니까. 너무 엄숙하거나 지나치게 자기만의 신념을 반복해서 강조하면, 상대방은 자칫 거부감을 느낄 수 있다. 재미 요소는 누군가의 불편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생각보다 훨씬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다양성에 대한 존중, 지속가능성과 ESG 그리고 재미가 가치소비의 재료로 버무려져 건강한 식단을 만들어내고 있다. 기호의 차이가 존중될 때, 우리의 밥상은 더욱 풍요로워지고, 보다 다채롭고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데 힘을 보태게 될 것이다.
그 누구도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이 정도로 인기를 끌 것으로 예상하지 못했다. 방송 콘텐츠의 다양성에 대한 기갈과 탄탄한 연기력, 높은 완성도의 시나리오가 지금의 우영우 신드롬을 견인했다. 식문화의 다양성도 마찬가지다. 여러 요소의 완성도가 동반 상승하여야 한다. 드라마 밖의 우영우도 마음 편히 김밥을 먹을 수 있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김민석
필명으로 몇 권의 책을 펴내고 다양한 매체에 글을 써온 칼럼니스트. 대체투자 전문 자산운용사인 마스턴투자운용에서 브랜드전략팀장과 ESG LAB의 연구위원을 맡고 있다. MBA 졸업 후 공적 가치와 ESG를 더 공부하기 위해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KBS 라디오에 정기적으로 출연해 소비 트렌드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다. 대통령 직속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 한국남동발전 ESG디자인단 등으로도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