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중국 음식을 먹으러 대림동에 갔다. 지하철을 내려 거리를 걸으니 중국어 간판이 즐비했다. 동네 중국집에서 보던 한자와 다른, 간체 한자로 쓰인 간판들이다. 짜장면과 탕수육이 아니라 마라탕, 꿔바로우, 가지볶음 등등 대표 요리도 다르다. 지나다 본 편의점에서는 두리안을 팔고 있었다. 다른 지역의 편의점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풍경이다. 대림동 식당가는 중국 도시 어딘가를 걷는 기분이다.
일찍이 외국인들이 많이 찾았던 이태원에는 태국과 베트남, 네팔, 스페인, 터키, 브라질 등 세계 곳곳의 음식점이 있다. 대림동은 중국,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주변은 러시아 등 특정 지역에 한 나라의 음식점과 식자재 전문점이 모여 독특한 문화를 이루기도 한다. 이태원과 홍대, 강남 등 번화가만이 아니라 어떤 지역에서도 다양한 나라의 음식점을 발견할 수 있다. 독특한 음식을 먹고 싶은 한국인들은 베트남의 반쎄오, 이집트의 홈무스, 브라질의 슈하스코 등 새로운 에스닉 푸드를 만드는 음식점을 찾는다.
(좌) 반쎄오(출처=클립아트코리아), (우) 슈하스코(출처=텍사스데브라질 홈페이지)
1980년대만 해도 한국에서 먹을 수 있는 외국 음식은 중국집과 경양식, 일식집 정도였다. 한국은 올림픽이 열린 1988년이 지나서야 여행 자유화가 이루어졌다. 아무나 외국을 나갈 수 없었던 과거와 달리 1990년대에는 특권층이 아닌 보통 사람들의 해외 유학과 배낭여행이 줄을 이었다. 외국을 다녀온 사람들이 현지에서 먹었던 음식을 한국에서도 찾으면서, 자연스럽게 외국 음식점들도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다.
이집트 음식 홈무스 ⓒ클립아트코리아
보통 1인당 GDP가 1만 달러가 되면 미식 문화가 시작되고, 2만 달러를 넘어서면 대중적으로 확산된다고 한다. 한국의 1인당 GDP(Gross Domestic Product, 국내총생산)는 1994년 1만 달러였고, 2006년 2만 달러, 2018년 3만 달러를 넘었다. 에스닉 푸드도 함께 성장했다. 2천년대 초반까지 다양한 나라의 요리를 맛볼 수 있는 음식점이 생겼다. 그리고 해외에서 직접 요리법을 배우고 돌아와 음식점을 차리는 단계로 넘어갔다. 일본 라면과 돈카츠, 미국 수제 버거와 스테이크, 이탈리아 스파게티와 피자 등은 현지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성장했다.
일본 음식 라멘 ⓒ클립아트코리아
이제 한국의 에스닉 푸드는 새로운 단계에 있다. 이주민을 통한 에스닉 푸드의 보급이다. 한국은 초고령화 사회로 빠르게 진입 중이고, 출산률은 OECD 국가 최하인 0.81명이다. 농촌과 건설 현장, 중소규모 공장 등은 이주민 노동자 없이 굴러가지 않는다. 이주민의 에스닉 푸드는 동일한 문화권의 식자재와 음식을 공유하는 커뮤니티로 성장하고, 지역사회와 교류하면서 에스닉 푸드 음식점으로 자리잡게 된다. 단지 외국의 음식을 한국인에게 제공하는 것을 넘어서 한국 사회와 이주민의 교류가 이루어지는 공간이 되는 것이다. 에스닉 푸드의 광범위한 성장은 세계의 다양한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점을 넘어 한국이 다원화, 다문화의 사회로 진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인을 얕잡는 단어인 ‘짱깨’라는 말이 짜장면에서 나왔고, 일본에서 재일교포를 혐오하며 ‘기무치’(김치)라고 부르는 것처럼 독특한 냄새나 맛이 나는 음식은 종종 차별의 대상이 된다. 에스닉 푸드의 대중화는 소수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극복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음식의 교류를 통해 다양한 에스닉 푸드가 한국인의 생활 속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에스닉 푸드는 타 문화에 대한 이해 그리고 이주민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잇는 매개로서 작용할 수 있다. 에스닉 푸드는 타 문화와의 접촉과 교류 나아가 융합이 이루어지는 대중적이고 활발한 영역인 것이다.
김봉석
대중문화 평론가, <씨네21>, <브뤼트>, <에이코믹스> 등의 매체와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프로그래머를 거쳤다. 어린 시절부터 영화, 소설, 만화를 좋아했고 어른이 되어서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자연스레 대중문화평론가, 작가로 활동하며 『나의 대중문화 표류기』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내 안의 음 란 마귀』 『좀비사전』 『탐정사전』 『나도 글 좀 잘 쓰면 소원이 없겠네』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