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제본가가 말하는 전통과 현대(이보영 예술제본가) 첨부이미지 : 예술제본가 이보영.jpg

문화다양성 인터뷰에서는 문화다양성 가치 확산을 위해 매월 특정 주제와 관련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질문하고, 그 생생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이달의 첫 번째 인터뷰에서는 프랑스 파리 유학 후, 예술제본가 활동 및 교육활동에 힘쓰고 있는 이보영 예술제본가를 만났습니다.

1. 이보영 예술제본가님 소개를 부탁드려요.

안녕하세요. 예술제본가 이보영입니다. 저는 말 그대로 '책을 만드는(製本)' 사람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책을 만드는 것이 아닌 '읽는 책'으로써의 가치와 '보는 책'으로써의 경험을 주기 위해 책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정확히는 '예술제본가'라고 하죠. 저는 현재 종로에서 유럽 전통, 특히 프랑스의 전통 제본양식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2. ‘예술제본가라는 직업 우리나라에서는 많이 생소한데요. ‘예술제본가는 어떤 일을 하는 건가요?

▲이보영 예술제본가를 통해 복원된 책 ‘앙코르(EN Coree)’ ⓒ이보영

 

제본가라는 용어는 본래 리가토르(엮는 사람)이라는 말에서 유래했습니다. 제본이라는 행위의 시작은 14세기에 들어서야 '제본가, 프랑스어로 relieur라는 용어가 도입되어, 중세시대 수도원에서 필사본을 엮는 일을 시작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오늘날 예술제본가는 애서가나 출판인, 예술가, 문인들을 위한 귀중한 한정본이나 초판본, 포트폴리오, 방명록, 그림 등을 한 권의 '책'의 형태로 재구성하는 작업을 합니다. 또한 책의 내용과 책을 보는 사람의 성향 등을 면밀히 고려하여 책을 재구성하는 것은 물론, 보수·복원의 보존적 기능과 함께 심미적 가치를 더한 예술로써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도 예술제본가의 몫이죠.
 
3. 선생님께서 예술제본을 알게 되고직업으로 삼게 된 계기가 있으셨나요?

프랑스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불어를 접하게 되면서부터 였습니다. 이후 점차 프랑스 문화를 깊이 체험하기 위해 2005년 봄에 프랑스 유학길을 택하게 되었습니다. 프랑스 유학 시절 어느 한 제본공방을 방문하여 우연히 예술제본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고, 이내 고색창연한 문화와 분위기에 매료되어 예술제본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공방에서 예술제본을 체험하고 실습을 통해 책을 꿰매고 단장하는 일에 흠뻑 빠져들게 되었고, 프랑스 제본가들의 작품들을 직접 접하게 되면서 제본가로서의 삶을 동경하게 되었습니 다. 그러던 중 당시 저의 스승이셨던 이자벨 포르의 추천으로 국립제본학교에 입학하고 기능인증 자격을 받은 후, 귀국하여 예술제본가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4. 예술제본가의 하루는 어떤가요?

ⓒ이보영

1인 공방으로써 혼자서 의뢰 상담부터 일대일 개인별 수업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인 일을 혼자서 하기 때문에 매우 부지런해야 합니다. 정해진 수업시간 외에는 개인 작업을 통해 맡겨진 책을 일정 기간 동안 완성해야 하기 때문에 그날그날의 작업 분량을 정하고 완수하려고 합니다. 수강생과의 수업, 제작을 맡기러 오시는 분들과의 만남, 전화 상담 및 메일회신, 재료구입(종이나 가죽 등), 공방정리 등 반복되는 일상 속에 가끔씩 부피가 큰 책 의뢰 같이 작업량이 많은 경우에는 늦은 밤까지 작업하곤 합니다.
 
5. ‘제본’ 앞에 예술이 붙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보통 인쇄소에서 하는 일반 제본과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제본은 읽는 책으로써의 기능만이 아닌 책을 소장하고 감상하기 위한 기능을 하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이기도 합니다. 제본가의 기술과 예술이 빚어낸 오브제(objet)로써의 책은 말 그대로 예술품이 되는 것이죠. 유럽 등 해외에서는 오늘날 명망 있는 제본가의 작품들이 경매를 통해 소개되거나 소장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매년 고서전이나 전시회를 통해 작품들이 대중들 사이에서 고가로 활발하게 거래, 판매되고 있습니다.
 
6. 주로 어떤 책을 의뢰받으시는지 궁금합니다가장 오래된 책은 무엇이었나요또 가장 힘들었던 작업은 무엇이었나요?

의뢰받는 책의 유형은 매우 다양합니다. 작은 그림책이나 소설, 애장도서, 국내외 초판본에 이르기까지요. 엄마가 딸을 위해 쓴 수많은 편지들, 아빠가 딸을 생각하며 쓴 추억의 일기장, 오래된 악보나 필사한 성경과 그림 등 책의 유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그 유형과 종류가 다양합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책은 18세기에 영국에서 출판된 한 여행기 초판본 6권을 복원하는 일이었는데, 훼손된 책등의 금박을 새로 각인하는 등의 작업을 했던 기억에 남습니다.
 
7. 선생님이 직접 작업하시고소장하고 있는 작품도 있나요?

첫 번째 책은 19세기 프랑스 여성작가였던 시도니-가브리엘 콜레트의 저서인 [마르게리트 모레노에에게 쓰는 편지]라는 책입니다. [콜레트]라는 영화로도 제작되었듯 시도니-가브리엘 콜레트는 보수적이었던 프랑스 사회 분위기 속에서 세상의 편견과 억압에 정면으로 맞서 베스트셀러 작가로서의 인생을 살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녀 인생의 당당함과 진취적 발상, 행동을 좀 더 도발적인 색깔과 과감한 패턴으로 '책'에 표현하고자 노력했던 작품입니다.

▲예술제본 작품 ‘콜레트’ ⓒ이보영

 

두 번째 책은 20세기 중반 프랑스의 실존주의 소설가이자 사상가인 시몬 드 보부아르의 작품인 "애매함의 도덕에 관하여"와 "피루스와키네아스"의 두 작품을 한 권의 책으로 제본한 것입니다. 시몬 드 보부아르가 고집해 온 논리적 사고의 전개, 사회주의 사상과 행동의 일관성을 추구하고자 하는 그녀의 행 동양식을 일관된 패턴과 흑백컬러 대비를 활용하여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예술제본 작품 ‘시몬 드 보부아르의 책’ ⓒ이보영

 

 8. 예술제본은 전통 제본방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옛날 방식의 작업을 고수하는 이유가 있나요?

예술제본은 대량 생산방식이 아닙니다. 오랜 '시간'과 '압력'을 필요로 하는 수공의 작업 과정입니다. 이 모든 과정은 0.1mm까지 계산해야 하는 정밀함을 요구할 뿐 아니라 그러한 정밀함을 오직 손과 도구만을 이용해 섬세하게 표현하고 조율합니다. 기술과 문명의 발달은 인쇄기술과 제본방식의 편리함을 주긴 했지만, 사람이 만든 도구와 사람의 손은 어쩌면 기술을 뛰어넘는 섬세함과 따뜻함이 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예술제본 작업 사진 ⓒ이보영

 

9. 요즘은 전통적인 것을 오히려 힙(hip)하다고 말합니다전통가옥전통음악한복 등 전통을 현대적으로 변형하여 사용하기도 합니다선생님께서는 이러한 경향을 어떻게 보시나요?

전통적인 문양이나 방식은 그 시대의 지혜와 아름다움을 반영합니다. 현대를 더 돋보이게 할 수 있는 획기적인 방향이라면 전통제본 기술과 현대의 기술, 소재, 아이디어의 융합은 얼마든지 함께 이루어질 수 있는 분야입니다.
 
10. 마지막으로 일반인들에게 전통방식을 통한 예술제본의 매력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예술제본은 주어진 제약 조건 속에서 ‘책’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정체성과 목적을 온전히 보존하고 살리면서 새롭고 다양한 미적 해법을 탐구하는 과정입니다. 예술제본의 과정은 오랜 시간과 끈기, 인내를 필요로 하지만, 책의 구성요소들을 조심스럽게 재분리/배치하고, 낱장 하나하나의 기록물들을 견고하게 엮고 새롭고 아름답게 가공하는 과정에서 예술제본가의 테크닉과 예술적 안목이 더해져 ‘읽는 책’으로써의 본질적인 가치와 ‘보는 책’으로써의 심미적 즐거움을 모두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술제본가 이보영
이보영 예술제본가는 2005년에 프랑스 파리로 유학, Lycee professionnel Tolbiac에서 전통제본기술 과정 을 수료하고, 이후 프랑스 문교부주최 ‘제본금박부문 교원기술자격증(CAPcertificate d’aptitude professionnelle)’을 획득하였으며, 파리의 다수 Atelier에서 활동하며 루브르도서관, 국공립도서관, 지자체정부, 기업체 등 고서적에서 일반 문서와 잡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책 복원 및 제본작업을 수행했습니다. 특히 금박기 술은 프랑스 주요 현대금박가인 쟝삐에르 루소(Jean- Pierre Rousseau)와 스테판 강글로프(Stéhane Gangloff)에게 사사받았습니다. 2010년 귀국 후, 서울 종로구 율곡로에 소재한 예술제본공방인 '보영리아뜰리에 '를 운영하고 있으며, 프랑스의 전통 예술제본 기술의 연구 및 여러 공공기관단체, 기업, 개인 등의 의뢰를 통해 고서 복원 및 제본작업을 진행해 오고 있습니다. 또한 프랑스 전통 예술제본의 저변을 확대하고 제본가로서의 역량을 키우고자 예술제본가 교육 및 양성에 힘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