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다양성 주간을 맞아 각기 다른 분야에 종사하는 10명의 문화 예술인들이 그들 각자의 추억 속에 있는 추천공연들을 꼽았다. 2021년 한국 사회에서 우리가 서로의 다양성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데 도움이 될 6편의 작품을 소개한다.
공연을 기억하다
몇 년 전만 해도 인류가 멸망한다면 핵전쟁이나 하다못해 좀비 바이러스 때문일 줄 알았던 시절이 있었다. 팬데믹으로 인류는 멸망하지는 않았지만, 각자의 나라에 고립됐다. 사람들이 모이는 라이브 공연장은 갑자기 가장 위험한 장소 가운데 하나가 되어 문을 닫아 걸었다. 많은 공연들이 취소되거나 연기되거나 기간이 줄어들었고 모든 공연의 좌석이 갑자기 지나치게 쾌적한 넓이를 보장받았다. 라이브 공연을 OTT를 통해 영상으로 볼 수 있게 되어 브로드웨이에서도 매진되는 뮤지컬을 볼 수도 있게 되었지만, 그것은 이미 라이브가 아니다.
라이브 무대를 볼 때 관객은 자신의 눈으로 무엇을 볼지 선택한다. 연출의 의도와 배우의 연기가 그 눈길을 이끌지만 결국 마지막 선택은 보는 본인에게 달렸다. 하지만 영상으로 박제된 무대는 다르다. 보여주는 것만 볼 수 있고, 들려주는 대사나 노래만 들을 수 있다. 관객은 능동적인 라이브 공연의 중요한 축으로부터 축출되어 일방적이면서도 지극히 수동적인 입장으로 전락한다.
많은 이들이 라이브 공연과 극장의 종말을 성급히 예측했지만 이제 라이브 공연이 세상으로의 복귀를 선언하고 있다. 기억 속 극장에서만 거듭 상연되었던 그 공연들이 다시 관객을 만나러 오고 있다고 믿고 싶다. 그리하여, 마침내 공연을 기억했던 시절을 기억 너머로 보낼 수 있게끔.
-정영주‘s pick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
(원작 : 영화 빌리 엘리어트, 작곡 : 엘튼 존, 대본, 작사 : 리 홀)
정영주's 추천사
긴설명이 필요없는. 고군분투 소년성장기 무지한 어른무한반성기.
꿈이!꿈은! 꾸고꾸고꾸어도. 넘치지않아
그러니 날아!날아올라~~라고 등두들겨준다
원작 영화와 뮤지컬의 시나리오를 쓴 작가 리 홀은 영국의 대처 수상과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이 밀어붙였던 신자유주의 정책을 혐오했다. 자본가의 세금을 감면해주면 낙숫물 효과가 서민까지 적실 것이라는, 소위 가진 자의 돈 벌 자유를 보장하는 신자유주의는 그들의 잔만 거대해진다는 사실만 증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그의 생각을 작품 속에서 웅변하지 않는다. 발레리노가 되길 꿈꾸는 탄광 마을의 소년 빌리가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몸부림 치는 과정을 통해 정부의 정책 하나가 한 마을, 한 가족, 한 인간의 꿈 전체를 뿌리부터 뒤흔들 수 있음을 보여줄 뿐이다. 그리고 빌리는 그 모든 경계와 한계를 뚫고 날아오른다. 어떻게 이 소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요조’s pick
판소리 <노인과바다>
(원작 : 헤밍웨이, 대본. 작창 : 이자람)
요조's 추천사
고전문학과 판소리를 접목시킨 위대한 예술, 예술가
이자람이 판소리 ‘억척가’를 공연하다 말고, 아니 공연하면서 관객들에게 막걸리를 따라주던 순간을 지금 와서 떠올려보면 새삼 마법과도 같다. 무대 위의 배우가 관객에게 말을 걸고 관객들은 그가 따라주는 술을 받아 마셨고, 멀리 있는 관객에게는 건네 건네 잔이 갔다. 그가 울면 같이 울다가 그가 웃으면 흐르던 눈물이 금세 말라붙었다. 이자람의 공연은 표를 구할 수 있다면 봐야 한다.
판소리 ‘노인과 바다’는 약간의 소품과 의상을 사용했던 ‘사천가’, ‘억척가’와 달리 형식은 단정한 판소리 공연이되, 내용은 노인과 바다를 채워 넣었다. 최근작인 ‘이방인의 노래’에 이르기까지 이자람의 활동이 계속되는 한, 어쩌면 여기서 소개하는 작품들 가운데 가장 빨리 다시 볼 수 있을 수도, 아닐 수도 있는 작품이겠다.
-정세랑‘s pick
뮤지컬 <위키드>
(원작 : 그레고리 맥과이어, 작곡, 작사 : 스티븐 슈워츠, 대본 : 위니 홀츠만)
정세랑's 추천사
여러 번 봐도 좋은 이야기의 힘에 대해 생각한다.
<오즈의 마법사>도 좋아하지만 <위키드>는 언제 봐도 울게 된다.
울고 나서 중력을 조금쯤은 거스를 수 있을 것 같아진다.
오즈의 마법사에 등장하는 서쪽 마녀와 동쪽 마녀의 숨겨진 이야기를 다룬 장편 소설의 일부를 뮤지컬로 옮기면서 글린다와 엘파바의 우정이 주축이 되었다. 덤으로 오즈의 마법사에 등장하는 겁쟁이 사자, 심장 없는 양철 나무꾼, 뇌를 얻고 싶은 허수아비, 하늘을 나는 원숭이, 초록 마녀의 출생의 비밀 등, 수많은 뒷이야기를 알 수 있다.
뮤지컬 ‘빌리 엘리엇’이 춤에 감전되어 하늘을 날아 올랐다면 초록의 엘파바는 편견을 딛고 중력을 거슬러 날아오른다. 대세를 거스르지 말라고 교육 받아 왔기에 그들의 비상이 주는 쾌감은 더욱 짜릿하다.
-이길보라‘s pick
연극 <344명의 쌍년들>
(작,연출 : 강윤지, 극단 Y)
이길보라's 추천사
‘낙태죄'가 폐지된 2021년 한국에서 임신중지 경험을 말하는 배우들과 흐느끼는 관객 사이에 앉아 있는 경험이 인상적이었다. 우리의 몸에 관한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344명의 쌍년들은 1971년 4월 5일, 프랑스에서 “나는 낙태했다”고 공개 선언을 한 여성들과 1972년, 성폭행으로 임신하여 임신중지를 선택하여 기소된 ‘보비니 재판’의 주인공인 16살 미성년자 여학생을 합한 숫자다.
한국에서는 2021년 낙태죄가 폐지됐지만 이는 사실상 상징적일 뿐 세부사항으로 들어가면 여전히 여성들의 임신을 법으로 제한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게다가 임신중지를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위한 세부 규정이나 대체법은 여전히 백지상태다. 임신중지가 죄가 아니지만 이를 실행하기 위한 제도는 답보상태인 상황에서 한국은 현재 낙태했다를 외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이 연극은 여전히 제목만으로도 충분히 유효하다.
-노명우‘s pick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
(원작, 대본 : 마뉴엘 푸이그)
노명우's 추천사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두 남자, 한 남자는 정치범 또 한 남자는 남자를 사랑하는 동성애자. 그들의 이야기를 연극으로도 더욱 생생하게 만나볼 수 있다.
아르헨티나 작가 마뉴엘 푸이그의 1976년 소설을 1983년에 희곡으로 각색한 작품으로 일상에서 전혀 만날 일 없었을 드랙퀸 몰리나와 사회주의자 혁명가인 발렌틴이 감옥에서 만나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기까지를 담고 있다. 1985년에는 영화로도 제작되었고 1993년에는 뮤지컬 ‘시카고’로 유명한 콤비 프레드 엡과 존 칸더에 의해 뮤지컬로도 공연되었다.
발렌틴을 감시해 정보를 빼내라는 감옥 소장의 명령을 받은 몰리나와 그런 몰리나를 혐오하던 발렌틴이 상대방에 대한 선입견을 걷어내고 진심으로 마주하기까지의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그려진다. 늘 그렇듯이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가 되기 마련인데, 그들의 관계에서 정말 약자는 누구일까? 극한의 상황에서조차 피어나는 사랑은 마치 아스팔트 한가운데서 피어난 풀 한 포기를 발견했을 때처럼 아름다우면서도 애잔한 이중의 감정을 자아낸다.
-유태평양‘s pick
국립창극단 <절창>
유태평양's 추천사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두 남자, 한 남자는 정치범 또 한 남자는 남자를 사랑하는 동성애자. 그들의 이야기를 연극으로도 더욱 생생하게 만나볼 수 있다.
국립창극단에서는 매달 완창 판소리 시리즈를 공연해 왔다. 창극단 소속의 배테랑 소리꾼들이 돌아가며 판을 벌리는데, 여타 무대 공연에서는 보기 힘든, 관객과 소리꾼의 주거니 받거니 추임새가 들썩이는 무대를 경험할 수 있다. 우리 소리를 완창으로 들을 수 있는 귀한 무대이면서도 티켓 가격은 전석 이만원으로 한껏 낮추었다.
그런데 국립창극단에서는 올해부터 거기에 젊은 소리꾼들의 자신 있는 판소리 한 토막을 더 얹었다. 첫 공연은 각자 탄탄한 팬층을 확보하고 있는 유태평양과 김준수가 맡아 판소리 관객의 연령대를 한층 낮춰볼 준비를 갖췄다. 완창 시리즈에 비해 더 다양한 레파토리를 자유자재로 구가하며 젊은 소리꾼들이 기량을 발휘할 기회다. 이 참에 판소리는 고루하다는 편견을 아주 산산이 부숴주기를 기대해 본다.
글 이수진(공연평론가, 극작가)
극작가 겸 공연평론가 이수진은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를 본 이후 뮤지컬에 대한 호기심과 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를 동시에 획득했다. 이후 한국 뮤지컬계의 고전으로 꼽히는 책 ‘뮤지컬 스토리’를 썼고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와 ‘그리스’를 번역했다. ‘콩칠팔새삼륙’,‘신과 함께 가라’ 등의 뮤지컬을 쓰며 여전히 무대 언저리를 헤매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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