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게시물은 'K-컬처와 다양성’을 주제로 외부 필자가 개인적 견해를 바탕으로 작성한 에세이입니다.
우리 엄마는 드라마 박사다. 나는 TV 없이 산 지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다. 그럼에도 뭣이 중한지 알고 있다. 당연히 엄마 덕분이다. 엄마는 세상에 나오는 모든 드라마를 섭렵한다. 모든 것을 본방 사수 한다. 이제 곧 연금이 나오는 나이가 된 엄마는 스카이캐슬부터 상속자들, 알고 있지만, 내 아이디는 강남미인 까지 가리지 않고 본다. 지니와 넷플릭스까지 설치해 드리니 천군만마를 얻은 듯 OTT 서비스의 트렌드를 따라간다. 나보다 요즘 애들의 연애사를 잘 알고 있으며, 대학 생활에 훤하다. 대한민국의 누구나 그러하듯 꽃미남의 기준에 깐깐하다. 차은우, 송강, 송중기 정도가 겨우 엄마가 인정하는 미남의 대열에 들어간다. 그 외의 것들은 '내용'이 몹시 중요해진다. 그들이 30인치 화면이 가득 차면 엄마는 짝짝 손뼉을 친다. 하여튼 나는 대충 할 일을 하다가 엄마가 보라는 드라마만 눈여겨보면 된다.
ⓒ클립아트코리아
엄마는 그중에서도 나의 아저씨, 멜로가 체질, 나의 해방일지를 각각 5번 이상 밥상머리에서 언급했다. 그중에서도 나의 아저씨는 제발 좀 보라고 몇 번 협박을 받았다. 그 드라마가 좋은 이유는 대략 한두 문장으로 정리되곤 하지만, 그걸 말할 때 엄마의 표정은 오만가지 감정이 교차한다. 나는 고개를 드라이하게 몇 번 끄덕이며 안다. 아, 그러니까 그것들이 '지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K-드라마'이군. 미스터 션샤인과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도 각각 3번 언급되었다. 과연 엄마의 안목에 감탄한다. 엄마에게 언급되지 않더라도, 그 드라마들은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눈에 띄게 다른 서사를 가져온 드라마로, 작품성 높은 드라마로, 참으로 자랑스러운 드라마로 언급되는 작품들이었으니까. 엄마는 드높은 꽃미남의 기준을 가지고 있고 어리고 하얗고 잘생긴 얼굴만 나오면 채널을 고정하지만, 그들이 나온 드라마라고 해서 마구 언급하는 법은 없다. 이를테면 부부의 세계와 상속자들 같은 드라마를 재미있게 봤지만 나는 반찬 앞에서 그 얘기를 들은 적이 없다. "왜 그 드라마는 얘기 안 해?" 물으면 엄마는 말한다. "그건 다른 세상 이야기니까."
엄마는 젓가락질을 멈추고 잠시 고민에 빠진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드라마가 뭐냐"고 물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한참 고민 끝에 '응답하라 시리즈'라고 답한다. 엄마가 좋아하는 드라마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나 같은 사람들이 주인공인 이야기"다. 응답하라 시리즈라면 나도 할 말이 있다. 한국 드라마라면 보지도 않고 코웃음을 치던 시기, 우연히 틀게 된 응답하라 시리즈 1화를 본 후로 단숨에 끝까지 정주행했다. 겨울날 이불을 뒤집어쓰고 혼자 사는 집에서, 반찬 한 개 하면 이웃집과 나누다가 결국 10첩 반상이 되어버리는 장면을 보며 혼자 울고는 했다. 나는 마을을 만들고 싶구나, 사람들 사이에서 살고 싶구나, 누군가의 문지방을 저렇게 넘나들고 싶구나. 그 장면을 보며 알게 되었던 것 같다. 엄마는 '그 시절을 지나왔다면 알 수밖에 없는 디테일들'이 사무치고 아름답고 참을 수 없이 웃긴다고 말했다. 소탈하면서도 정확한 엄마의 통찰에 놀랐더랬다.
<응답하라 1994> 포스터 ⓒ핀터레스트
언젠가 한 출판사에서 일하던 시절에 고객의 전화를 받은 적이 있다. 언뜻 들어도 조금은 서투른, 중국식 영어 발음으로 누군가 물었다. "응답하라 시리즈 대본집을 구할 수 있나요?" 응답하라 시리즈 대본집은 저작권의 문제로 절판 상태였고, 더 이상 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설명하니 아쉬움의 탄식과 어떤 방법이 없겠냐는 서투른 영어가 다시 돌아왔다. 나는 죄송하다고 답하고, 헌책방을 둘러보시는 것은 어떠냐고 제안했다. 그러면서도 놀랐다. 한국의 한 시대를 그렸을 뿐인 드라마가, 타국의 전혀 다른 문화권의 누군가에게도 이토록 인상 깊은 이야기가 될 수 있구나 하고. 어쩌면 이야기는 공통된 경험을 전제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유한 세계를 촘촘히 그려내는 데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라나 문화, 시대나 세대에 따라 서로 다른 존재로 나누기보다는 인간적인 것을 말하는 드라마 말이다.
ⓒ넷플릭스
한편 내가 즐겁게 본 드라마는 '성난 사람들 (Beef)'이다. 미국에서 제작되었지만 출연하는 얼굴들은 익숙하다. 크레딧에 적힌 이름들도 낯익다. 제작진의 대부분이 아시아나 한국계다. 아시아 창작자들의 자전적 이야기를 각색하여 풀어낸 이 드라마는 이국적이면서도 익숙한 분위기를 동시에 풍긴다. 아시안이라는 소수성으로만 풀어낼 수 있는 시각을 감각적이고 날카롭게 풀어낸다. 세련되면서도 탁월하고, 몹시 화가 나 있으면서도 재치 있다. 주인공이 아닌 것 같은 사람들이 주인공이 되어 있다. 전반적 흐름에 있어 내용과 말하는 주체가 모두 주인공에서 비 주인공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이라는 말을 넓히고 재정의하는 일들이 일어난다. 그런 시도에 성공한 드라마는 전 세계로 뻗어나가며, 엄마와 나의 밥상에도 오른다. 이러한 흐름을 지켜보는 일은 즐겁지 않을 수 없다. 지금 그 큰 줄기를 주도하고 있는 것은 한국임에 자명해 보인다. 한동안 밥상에서 언급되는 드라마는 마르지 않을 것으로 보이니까.
양다솔
10년동안 쓴 글들을 모아 독립출판물을 발간하며 작가로 활동을 시작했다. 수필집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 <아무튼, 친구>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