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드라마 다양성 탐구 2.그 원인과 배경 (정호재 문화평론가) 첨부이미지 : 9.png

 

*본 게시물은 ‘K-드라마와 문화다양성’을 주제로 외부 전문가가 개인적 견해를 바탕으로 작성한 칼럼입니다.

 

문화에서 ‘다양성’이란 개념은 창작자가 마땅히 추구해야 할 긍정적 가치로 보인다. 그런데도 이를 직접 실천하기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탄탄한 작품성이나 낙관적 시장 전망 없이 이를 무리하게 시도했다간, 기존소비자의 반발과 외면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창작자, 소비자 그리고 제작자 모두가 시장을 긍정적으로 볼 때만이 소재와 구성, 작법 등에서 낡은 성공방정식을 파괴할 수 있다.
 
이러한 예는 드라마 소재 분야에서 가장 먼저 드러난다. 드라마는 현실감이 생명이기 때문에 작중 주인공의 직업과 무대로서의 직장의 비중이 절대적이다. 기왕이면 신선하고 매력적인 갈등 요소를 품어야 하므로 요리사나 스포츠 선수, 예능인이나 재벌 후계자 등 매력적 전문직 세계가 선택되기 쉽다. 그렇다면 대중들이 가장 선망하는 전문직은 무엇일까? 의사와 변호사가 대표적이다. 겉으로 화려하면서도 대중이 직접 경험하기 어렵고, 또한 고도의 전문성에서 나오는 문제해결 능력이 시청자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하기 때문이다. 의학 드라마라면 거대 병원 조직 내부의 암투를 그린 2007년 작 <하얀거탑>이 아직도 가장 먼저 떠오른다. 이 작품엔 일본 원작이 있다. 최근 한국에서도 <의사들의 슬기로운 생활>, <낭만닥터 김사부>, <외과의사 봉달희> 등의 명작이 숨 쉴 틈 없이 쏟아졌고 그만큼의 뜨거운 인기를 끌었다. 판사와 검사도 근래 영상매체에서 자주 다룬 소재다. 너무 많아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
 
그런데 소재를 확장해 ‘공인회계사’나 ‘변리사’라면 어떨까? 미국에선 회계사가 드라마나 영화 소재로 심심치 않게 등장하곤 했다. 친숙한 직역이고 기업과 조직의 부정거래를 파악하는 데는 회계사만 한 적임자가 없기 때문이다. 식상한 변호사와 달리 신선하다는 장점도 있다. 2016년 벤 애플렉 주연의 <어카운턴트>라는 영화가 있었고, 일본에서도 회계사는 이미 2008년도에 <감사법인>이라는 6부작 드라마 소재로 쓰인 바 있다. 한국에선 언제나 나올지 궁금했는데 2023년 여름 MBC에서 <넘버스>라는 이름으로 사상 처음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드라마 제작사나 방송사 입장에서는 결정에 엄청난 고민에 고민을 더했던 작품일 것이다. 매출액이나 자산과 같은 까다로운 숫자를 다루는 회계사라는 직업을 소재로, 쉽고 흥미로운 작품을 만든다는 건 흥행을 예측하기 어렵다.

 

드라마 <넘버스> 포스터 ⓒMBC

 

실제로 공인회계사가 첫 등장한 <넘버스>는 시청률 5%를 넘지 못하고 쓸쓸하게 퇴장했지만, 현재 한국 드라마, 즉 K-드라마 시장의 낙관적 상황을 보여주는 사례가 된다. 새로운 소재를 적극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시장 환경이 조성되었다는 얘기다. 판검사가 등장하는 법정 소재는 이제 더 이상 비틀게 없을 정도로 식상해졌다. 가장 최신의 히트작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선 좀처럼 현실성이 낮아 보이는 “장애를 가진 천재소녀”를 등장시키는 방식으로 감동을 극대화하는 데 성공했다. 당분간 이보다 더 충격적인 변호사 소재를 개발하기 어려울 수 있다. 자연스레 소재의 다양화로 소비자의 시선을 끌어야 한다. 작가들이 더 많은 직역과 배경을 탐구해야 가능한 영역이기도 하다.

OTT의 결정적 역할

코비드 팬데믹 이후 영상 시장에 들이닥친 새로운 환경이란, 영화와 TV 드라마의 구분이 사라졌다는 데 있다. 과거 이들 매체의 구분은 뚜렷했다. 영화는 2시간 동안 밀폐된 환경에서 거대한 화면으로 단체 관람하는 장르였다면, TV 드라마는 집에서 편안하게 누워 적어도 10시간 이상의 시리즈로 관람해야 하는 아주 사적이면서도 공짜 미디어였다. 하지만 이제 1) TV 화면이 대폭 커졌고 2) 넷플릭스 등 글로벌 영상 플랫폼(OTT)에 돈을 내게 되었고 3) 남들이 많이 본 작품을 시간 구애 없이 무제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영화와 드라마가 한 플랫폼에서 제공되니 더욱더 그렇다. 넷플릭스나 티빙, 쿠팡플레이 등 영상 유료 플랫폼을 OTT라고 하는데, 전 세계 공중파와 케이블TV 자본이 쇠락한 대신, 압도적 구독자 수를 지닌 온라인 슈퍼 콘텐츠 갑이 새로운 콘텐츠 제작자(공급자)가 된 것이다. 자연스레 소재의 다변화는 이 같은 환경변화의 부수적인 산물이 된다.
 
아주 운이 좋게도 팬데믹 이전에 극적으로 성장한 K-드라마는, 전 세계에 하나의 장르로까지 자리매김할 정도로 양과 질에 있어 크나큰 성장을 일궈냈다. 2000년대 초반 <겨울연가>와 <대장금>의 글로벌 인기를 시작으로 점화된 한류드라마 열풍은, 어느새 아시아를 뛰어넘어 서양의 시청자들까지 설득해 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물론 불만도 많았다. K-드라마 특유의 소재와 표현 기법 상투성의 지적이 바로 그것이다. 재벌 도련님이 등장하고, 평범한 여자주인공을 둘러싼 사랑의 암투가 존재하고, 결혼과 장례식의 빈번한 우연과 자극적 요소가 주로 열광과 동시에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런데 자본과 인재가 몰리며 이 같은 단점도 서서히 극복되는 모양새이다. 과거 러브스토리 위주에서 군인, 좀비물, 사회 이슈(촉법소년, 학교폭력, 사적복수물 등), 노인 등 넓어진 것이다.
 

ⓒ클립아트코리아

 

글로벌 IP 경쟁 본격화

OTT 시대의 가장 큰 변화는 글로벌 자본에 의해 드라마가 사전 제작된다는 점이다. 드라마의 모든 IP를 글로벌 미디어 회사가 관리하게 되면서 IP(Intellectual Property)라고 부르는 ‘저작권’의 중요성이 더욱 커진 것이다. OTT 안에는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가 함께 존재하는 데 비슷한 설정이나 인물 캐릭터는 이제 당장에 전 세계인의 감시와 질타를 받게 된다. 위험부담이 커진 것이다. 그 때문에 꼭 필요한 설정이나 음악 미술 디자인은 반드시 사와야 하고, 극 전개에 방해가 되는 PPL은 전부 퇴출당했다. 이러한 환경 속에 탄생한 대작이 <킹덤>, <오징어 게임>, <지옥>, <D.P.> 등의 한국산 글로벌 콘텐츠다.
 
확고해진 시장 법칙, 즉 “반드시 순수한 창작물이어야 하고, 여의찮다면 IP는 반드시 사와야 한다”는 것은 중요한 변화다.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웹툰의 중요성과 시장이 커졌다. 작품을 반드시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기왕이면 잘 알려지고 탄탄한 원작이 필요한데, 한국에서 가장 신선하고 대중의 인지도가 높은 시나리오는 웹툰이 거의 유일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웹툰 플랫폼을 지닌 네이버와 카카오의 시장가치가 폭등하기도 했다.
 

ⓒ클립아트코리아

 

글로벌 콘텐츠 자본이 K-드라마로 몰리면서 소재의 다양화를 이끌었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된다. 더욱 결정적인 요인은 영상 플랫폼 ‘유튜브’의 존재감일 수 있다. 유튜브에는 소규모 창작자의 아이템도 IP로 변신하기도 하며, 동시에 OTT 바깥에 있는 소비자들의 궁금증을 풀어줄 요약형 콘텐츠도 무한대에 가깝다. 영상 시장이 커진 만큼 소재를 새롭게 발굴하는 것 자체가 큰돈이 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창작자는 마땅히 이러한 무한경쟁 환경에 발맞춰 보다 신선하고 자극적인 소재를 발굴하고, 더욱 흥미로운 스토리로 키워내야 할 책임감도 커진 것이다.
 
지난 한 해 넷플릭스에서 인기를 끈 한국 드라마의 소재 역시 상당히 다채롭다. 2023년 글로벌 순위 탑 50중 3위를 차지한 <더 글로리>는 학폭을 소재로 했고, 50위 안에 든 <피지컬>, <일타 스캔들>, <닥터 차정숙>, <환혼, 파트 1>, <환혼, 파트 2>, <철인 왕후>, <나쁜 엄마> 등의 텔레비전 콘텐츠도 기존의 방송 문법과 전혀 다른 창작물이다. 디즈니 플러스에서 대박을 터뜨린 강풀 웹툰 원작의 <무빙>은 할리우드 슈퍼히어로와는 전혀 다른 한국형 영웅의 모습을 실감 나게 그려냈다. 한국의 현대사와 소시민들의 정의감이 잘 조화를 이루며 전 세계인의 찬사를 받았다. 소재의 다변화를 뛰어넘어 이제 한국의 콘텐츠는 최근 “인종”과 “국적” “젠더”의 다양화에도 관심을 높이고 있다. 세계화 시대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긍정적인 시장 환경임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정호재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사에서 짧지 않게 기자생활을 했다. 싱가포르 국립대(NUS) 비교아시아학 박사를 취득했으며 동북아, 동남아, 남아시아를 두루 답사하며 태국의 탁신, 말레시아의 마하티르, 캄보디아의 삼랑시 등 각국의 주요 인사들을 만났다. 번역서로 《탁신-아시아에서의 정치비즈니스》, 《수상이 된 외과의사-마하티르 자서전》이 있으며, 2020년 《아시아 시대는 케이팝처럼 온다》를 펴냈다. 싱가포르와 미얀마 양곤 등을 오가며 연구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