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 애니메이션의 다양성을 위한 발걸음 (성상민 문화평론가) 첨부이미지 : 성상민.jpg

 사람들에게 ‘지금 당장 떠오르는 애니메이션 제작사’를 한 곳만 대라고 하면 어떤 제작사를 대답할까. 아마도 십중팔구는 ‘디즈니’(Disney)를 대답할 것이다. 100년 가까이 식지 않는 유명세를 누리는 중인 월드 스타 캐릭터 ‘미키 마우스’(Mickey Mouse)가 처음으로 탄생한 곳이자, 이후로도 <토이 스토리> 시리즈나 <겨울왕국> 시리즈 등으로 폭넓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제작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관객이나 평론가에게 가장 많이 비판받는 애니메이션 제작사 역시도 디즈니이다. 디즈니의 창립자인 월트 디즈니(Walt Disney. 1901 ~ 1966)부터가 지속적으로 인종차별주의자로 비판받는 것은 물론, 강도 높은 인종차별 묘사로 2021년 현재는 디즈니 차원에서 공개나 상영을 철저하게 제한할 정도로 악명 높은 애니메이션 <남부의 노래>(Song of South, 1946)을 제작한 곳도 다름아닌 디즈니였기 때문이다.

 

▲ 디즈니 애니메이션 <남부의 노래> (출처=위키피디아)

 

미국이 서부를 개척하며 원주민을 탄압한 역사를 미화했다는 논란을 받은 <포카혼타스>(1995), 집시 여성과 장애인을 기존의 고정관념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게 그렸다는 비판을 받았던 <노틀담의 꼽추>(1996), 디즈니가 처음으로 다룬 아시아 배경의 애니메이션이라는 의의에도 불구하고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 철저히 서구를 중심에 둔 동양에 대한 시선을 비판적으로 언급하는 명칭)에 입각한 이미지가 너무 강하다는 평을 동시에 받은 <뮬란>(1999) 등은 디즈니가 세계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지녔음에도 안이하게 애니메이션을 구성한다는 평을 함께 듣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비판들을 성찰한 결과일까. 21세기 이후로 현재까지 제작되는 디즈니의 애니메이션들은 이전의 작품들과는 달리 자신들의 작품을 접하는 다양한 관객들을 신경쓰려는 흔적이 돋보인다. 오랜 시간 손쉽게 사용되었던 인종이나 성별 등에 대한 고정관념을 타파하려는 시도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공주와 개구리> (출처=네이버영화)

 

디즈니가 본격적으로 달라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첫 번째 작품은 그림 형제의 동화 <개구리 왕자>를 원작으로 삼은 <공주와 개구리>(2009)였다. 원작 동화인 <개구리 왕자>가 철없는 공주가 저주에 걸려 개구리로 변한 왕자를 우연하게 만나, 또 다른 우연으로 인해 왕자가 본모습을 되찾으며 행복하게 산다는 전형적인 고전 동화의 서사였다면 <공주와 개구리>는 기본적인 플롯을 제외한 나머지 요소를 모두 비틀어낸다. 배경을 흑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현대의 미국 뉴올리언스로 설정하는 것은 물론, 주인공 여성도 흑인으로 설정하였다. 수동적인 존재를 벗어나지 못했던 원작의 ‘공주’와 달리, <공주와 개구리>의 주인공 ‘티아나’는 개구리 왕자 ‘나빈’과 티격태격하며 자신의 주체성을 가지고 움직인다. 플롯 자체는 고전적이어도, 뻔하지 않은 동시에 이야기에는 다양한 결이 있을 수 있음을 풀어낸 중요한 시도가 담긴 작품이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라푼젤> (출처=네이버영화)

 

이후로도 디즈니의 달라진 모습은 계속되었다. 그림 형제의 동명 동화를 원작으로 삼은 <라푼젤>(2010)은 원작에 담겨 있던 ‘탑에 갇혀 왕자의 도움을 기다리는 가녀린 라푼젤’이라는 이미지를 완전히 뒤집어 스스로 억압에서 탈출해 자유를 쟁취하려는 새로운 라푼젤 캐릭터의 상을 그려내 호평을 받았다. 2편이 제작될 정도로 큰 사랑을 받았던 <겨울왕국>(2013)은 <라푼젤>에 이어 왕자의 캐릭터를 배제하거나 비틀고, 주인공을 비롯해 주인공을 돕는 이도 모두 여성으로 설정하며 새로운 디즈니의 가능성을 보여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겨울왕국2>의 한 장면(출처=네이버영화)

 

그리고 2016년에 개봉한 작품 <모아나>에 이르러 디즈니는 20세기의 행보와 완연하게 달라진 모습을 더욱 본격적으로 드러낸다. 폴리네시아 지방의 설화를 기초에 삼은 <모아나>는 일종의 영웅 서사를 기초로 한다. 평온하게 살던 마을에 갑작스럽게 재앙에 닥치고, 모두가 어찌할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가운데 한 명의 ‘영웅’이 무수한 시련을 뚫고 땅에 깃든 저주를 풀어내는 것에 성공한다. 이러한 부류의 이야기는 <모아나>의 기원이 된 폴리네시아 설화는 물론 전세계 토속 신앙이나 민담에서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서사이다. 그러나 대개의 설화에서는 그 영웅에 위치에 남성이 주로 오르거나, 여성이 설사 모습을 드러난다 하더라도 제한저인 위치에 설 수 밖엔 없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모아나> 포스터(출처=네이버영화)

 

앞서 언급해던 <뮬란>에서는 ‘싸우는 여성’의 이미지를 강조하면서도 결국 자신을 지탱할 ‘남성 영웅’을 필요로 했었던 한계가 존재했다. 반면 <모아나>는 디즈니가 <뮬란>에서 보였던 실책을 최대한 피해나가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모아나>에서도 조력자 남성 캐릭터의 역할로 ‘마우이’가 등장하지만, 주인공 ‘모아나’는 ‘마우이’에게 크게 의존하지 않는다. ‘모아나’는 도전적인 정신을 잃어버리고 현실에 순응한 어른들을 대신해, 자진해서 저주와 재앙을 풀기 위해 동료들과 협력하며 녹록치 않는 여행을 떠나는 완연한 주체적인 캐릭터이다. 여전히 디즈니를 첫 장편 애니메이션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1937)로 기억하는 이들에겐, <모아나>에서 드러난 디즈니의 모습은 무척이나 큰 변화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디즈니 애니메이션<모아나>의 한 장면(출처=네이버영화)

 

물론 어찌보면 디즈니의 이러한 행보는 많이 늦은 길일 수도 있다. 애니메이션이 영화와 비교해 가장 큰 차이를 지니는 부분은 바로 ‘상상력’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CG 기술이 월등하게 발달해 이전의 영화에서는 감히 상상하지 못했던 압도적인 표현이 가능한 시대가 되었지만, 연속되는 이미지에 기초한 애니메이션은 일찌감치 영화가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자유분방한 표현 양식을 선보일 수 있는 장르의 영역이었다. 단지 월트 디즈니를 비롯해 많은 애니메이션 창작자들이 현실의 고정 관념을 넘는 대신, 이를 그대로 따르는 길을 반복했을 따름이다. 독립 애니메이션의 영역에서 디즈니를 비판하는 동시에, 다양한 실험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이전부터 존재했음을 생각하면 21세기 들어 두드러진 디즈니의 근래 다양성을 추구하는 모습은 오랫동안 이어진 변화의 요구에 대한 지체된 대답인 점도 없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즈니의 계속되는 변화의 움직임은 문화 다양성의 움직임이 미국은 물론 세계 애니메이션을 대표하는 디즈니를 바꿀 정도로 시대정신이 되었다는 점을 증명하는 중요한 움직임인 것도 분명하다. 특히 한국 애니메이션 상당수가 2021년 현재까지도 다양성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고정관념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상황에서 디즈니의 움직임은 한국에서 주의깊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언제까지 한국 애니메이션은 ‘남자는 파란색, 여자는 분홍색’. ‘남자는 힘센 왕자, 여자는 가녀린 공주’와 같은 수식을 반복할 것인가.
 
성별 고정관념이 여전히 한국 애니메이션에 강하게 담긴 상황에서, 나이나 성정체성, 인종 등등 다양한 정체성을 성찰하는 고민은 더더욱 찾아보기도 어렵다. 21세기 이후 디즈니의 변화는 어찌보면 한국 애니메이션, 더 나아가서는 한국 문화 전체에 있어서는 앞으로 나아가야 할 변화의 방향인 셈이다.

 

성상민
문화평론가. 2005년 데뷔하여 꾸준히 만화와 영화를 비롯한 다양한 문화 현상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2019년에는 만화 연구서 <지금, 독립만화>를 펴냈으며, <미디어오늘>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이와 함께 미디어 노동 인권 단체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의 상근자이자, 만화 연구 모임 ‘합정만화연구학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