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베 얀손'의 삶과 사랑, 그리고 무민 (김선오 시인) 첨부이미지 : 김선오-토베얀손.jpg

지난주에는 오랜만에 영화관에 갔다. 역병이 창궐한 이후 세 번째 영화 관람이었다. 팬데믹이 벌써 만 2년째 지속되고 있으므로 반년에 한 번도 영화관에 가지 않았다는 뜻이 되겠다. 이전에는 한 달에 몇 번씩은 영화관에 찾아가 영화를 보곤 했으니까 십 분의 일 수준으로 빈도가 줄어든 셈이다.

예술 영화를 주로 상영하는 작은 영화관이었음에도 상영관 좌석은 절반의 절반도 차 있지 않았다. 예술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영화인들이 겪고 있을 생계 문제와 창작자로서의 고통이 먼저 걱정되었다. 출판 산업은 책을 통해 독자와 소통하는 매체적 특성상 팬데믹의 역풍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안전했던 편이지만, 관객을 한자리에 모아 작품을 선보이는 것이 일반적인 영화나 음악, 미술 등의 장르에 종사 중인 사람들로서는 생계는 물론 작품 세계 자체에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집에서 이런저런 영상 콘텐츠를 재생할 수 있는 IPTV나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가 활성화되어 있는 요즘이지만 어두운 공간에서 커다란 스크린으로, 좋은 음향과 함께 영화를 ‘겪는’ 일과는 차원이 다른 경험일 수밖에 없을 텐데, 영화관에서 상영될 것을 상상하며 영화를 만들어나갔을 종사자들에게 ‘사회적 거리 두기’형 관람 방식은 어쩔 수 없으면서도 얼마나 맥 빠지는 일이었을까. 티켓 판매량 또한 많이 줄었을 것이므로 제작비를 메우기도 매우 어려웠겠지만, 그마저 영화관이 아닌 집에서 작은 화면으로 관객들이 영화를 본다면 창작자로서 상당히 속상했을 것이다.

▲영화 <토베 얀손> 포스터 (제공=영화사 진진)

영화는 광고 없이 시작되었다. 제목은 <토베 얀손>. 몸을 이루는 부드러운 곡선과 뽀얀 피부가 매력적인 캐릭터 ‘무민’의 창조자인 핀란드 예술가의 이름이기도 하다. 무민은 독특하게도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흔히 지니는 왁자지껄함 없이, 어딘가 북유럽의 느긋함을 떠올리게 하는 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다. 유럽은 물론 한국에서도 연령대와 무관하게 많은 사랑을 받는 호감형 캐릭터임이 분명하다. 호감형 캐릭터를 창조한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호감형일 것이다(!), 그는 본질적으로 무민을 닮은 부드러움을 소유한 사람일 것이다, 라는 나의 성급한 짐작과는 약간 다른 각도에서 토베 얀손의 전기 영화 <토베 얀손>은 진행되었다.

▲영화 <토베 얀손> 스틸컷 (제공=영화사 진진)

 
‘토베 얀손’은 우리가 흔히 어린이를 위한 애니메이션을 그리는 사람에게 갖는 편견과는 다르게, 자유분방하고 반항적인 기질이 강한 인물로 묘사되었다. 영화는 토베 얀손이 자유로운 몸놀림으로 춤을 추는 장면으로 시작되고 끝이 난다. 핀란드의 명망 높은 조각가의 딸이자 이른바 ‘순수 예술’을 하지 않으면 도태된 취급을 받는 집안 환경 속에서 토베 얀손은 자랐고, 그 속에서 자신만의 길을 찾고자 부단히 노력했으며, 본격적으로 만화가가 되기 이전 미술 작가로 활동하던 그가 끊임없이 끄적이는 ‘무민’ 캐릭터는 토베 얀손이 그러한 압박 속에서 견디고 성장할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미지 출처=무민 가족과 친구들@Moomin Characters)

토베 얀손은 독립적인 성향이 강한 동시에 사랑하는 이에게 감정적으로 헌신하고, 과감한 결정을 내린 후에는 불안감에 시달리거나, 자신의 예술가적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끊임없이 상처받으면서도 사랑과 삶에 있어서는 스스로의 선택에 정직한 모습을 보이는 입체적인 인물이다.

▲(좌) 영화 <토베 얀손> 스틸컷, (우) 토베 얀손의 모습 (출처=영화사 진진, 위키피디아)

예술가 지원금 선정 여부가 달린 전시회에서 당시로써는 용납되지 않는 흡연하는 여성의 그림을 전시한다거나, 유부남과 연애하는 동시에 유부녀와 사랑에 빠진다거나, 무민 캐릭터로 성공한 만화가가 된 스스로를 멸시하며 여전히 순수 예술을 동경하는 모습을 보이는 토베 얀손의 다양하고 인간적인 면모들은 영화를 ‘성공한 애니메이션 작가의 일대기’로 축약되지 않게 하는 다채로운 결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영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알 수 있었던 그의 다양한 모습과 끊이지 않는 고뇌는 분명 무민 캐릭터의 특징에 내재해 있을 것이었고, 그것이 무민이 널리 사랑받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었다.

▲ 영화 <토베 얀손> 스틸컷 (제공=영화사 진진)

몇 년 전 SNS에서 말도 안 되는 논란이 일었던 적이 있다. 출판사 ‘작가정신’이 무민의 그림동화 시리즈를 출간하며 “토베 얀손은 작고 외딴섬에 집 한 채를 짓고 홀로 살아가다 2001년 6월 27일 86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라고 소개한 것이다.

토베 얀손은 영화 <토베 얀손>에서도 등장하는 레즈비언 파트너 툴리키 피에딜테와 수십 년을 함께 살다 죽었고, 이 사실을 알고 있던 사람들은 출판사의 의도적이고도 명백한 곡해에 분노했다. 이후 작가정신은 “‘홀로’ 살아갔다는 의미는 ‘결혼하지 않았다’ 정도로 봐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우리 아이들까지 두루 읽힐 만한 책으로서, 일반적인 사회통념상 결혼을 하여 남편과 자식과 함께 살다 떠난 것이 아닌 정도로만 봐주세요”라는 말과 함께 웃음 이모티콘을 게재하며 논란을 유야무야 넘기려 했다. ‘일반적인 사회통념’이란 대체 무엇인가. 사람들은 항의했고, ‘무민’ 핀란드 공식계정은 오랜 파트너가 어떻게 그에게 영향을 주었는지 자세히 설명했다.

▲ 영화 <토베 얀손> 스틸컷 (제공=영화사 진진)

많은 사랑을 받는 ‘무민’ 시리즈의 캐릭터 중 둘만의 언어로 대화하는 토프슬란과 비프슬란은 토베 얀손이 너무나 사랑했던 레즈비언 연인 비비카와의 관계에 영감을 받아 탄생한 캐릭터이기도 하다. 토베 얀손의 사랑과 삶 없이는 ‘무민’ 역시도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감정에 늘 솔직했고 ‘사회 통념’과 ‘편견’에 대한 고민을 한평생 안고 살아온 토베 얀손의 생애가 담겨 있는 캐릭터 ‘무민’을 사랑한다면 그의 살아온 방식 역시 이해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무민’을 좋아하는 아이들이 영화 <토베 얀손>도 즐겁게 관람할 수 있는 ‘사회통념’이 도래하는 날이 오기를, 관람객이 없어 한적한 영화관을 빠져나오며 바라지 않을 수 없었다.

 

김선오
2020년 시집 <나이트 사커>를 통해 등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