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너를 홀대하지 않기를 (김달님 작가) 첨부이미지 : 썸네일8-9.png

친구 D가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업로드하는 브이로그를 자주 보는 편이다.
 (*브이로그: '비디오(video)'와 '블로그(blog)'의 합성어로, 자신의 일상을 동영상으로 촬영한 영상 콘텐츠를 말한다.) 
지금까지 업로드된 약 80여 편의 브이로그에는 D가 여행을 다니며 남긴 기록도 있지만, 대부분은 회사에 출근해 일을 하고, 친구들을 만나고,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평범한 일상이 담겨있다. 한 편당 10분 분량의 영상을 보고 있으면 내가 다 알지 못하는 D의 하루를 엿볼 수 있는데, 그중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장면은 D가 주방에서 요리를 하는 시간이다.


혼자 사는 D는 집에서 여러 음식을 만든다. 종종 집으로 놀러 온 친구와 함께 먹는 밥을 제외하곤, 회사 점심시간에 먹을 도시락과 집에서 혼자 끼니를 챙겨 먹기 위한 음식이다. 어느 날엔 가지 밥을, 어느 날엔 데친 오징어와 야채를 넣은 샐러드를, 어느 날엔 무조림, 명란 구이, 야채볶음, 메밀국수 등을 부지런히 만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영상 속에서 만족스럽게 먹는 D의 모습을 보는 것도 좋지만, 그 음식을 먹기 위해 긴 시간을 들여 재료를 손질하고 삶고 볶는 과정을 보고 있으면 늘 조금씩 감탄하게 된다. 깊은 무기력함을 자주 느끼는 D가 건강한 끼니를 챙겨 먹는 일만큼은 소홀하지 않으려 노력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D는 어느 여름날 두툼한 계란말이를 만드는 브이로그에 자막으로 적어두었다. 

출처=유튜브 '단도리 비디오'

「시간을 들여서 음식을 해 먹는 일은 나에게 힘이 되는 일이다. 아침에 눈을 뜨고 밤에 다시 잠이 들 때까지 오롯이 나 자신을 위해 하는 행동은 생각보다 드물다. (...) '나는 왜 무엇을 위해 살고 있을까?'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되지만, 어쨌든 나는 살아가야 하고 이왕이면 스스로를 미워하지 않고 예뻐해 주며 살아가고 싶다. 건강한 재료를 다듬고 요리하고 스스로를 위한 밥상을 차리는 것 정도로도 충분히 나를 아껴주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D는 나에게도 그런 시간을 주고 싶었던 걸까. 어느 날 D는 갑작스레 집으로 선물 하나를 보내주었다. 택배로 도착한 커다란 박스를 뜯어보니 크기와 쓰임에 따라 색깔이 다른 그릇 세트가 들어있었다. 혼자 사는 집에 이렇게나 많은 그릇이 생기다니. 그동안 나의 싱크대 위 선반에는 거의 쓰지 않는 밥그릇과 국그릇, 여러 개의 컵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예상하지 못한 선물을 전해준 D는 말했다. 

 

'혼자 먹더라도 건강하게 챙겨 먹고네가 너를 홀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의 일상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D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얼마나 건강한 식사를 챙겨 먹는 것에 무관심한지를. 나에게 집이란 그저 편하게 쉬고 잠을 자는 곳일 뿐. 식사는 주로 외식이나 배달 음식으로 해결해왔다. 마음먹고 산 식재료를 냉장고에 썩혀두기 바쁘고, 잘하지도 못하는 요리를 노력해서 하는 것보단 돈으로 사 먹는 일이 훨씬 쉽고 간편했기 때문이다. 물론 일회용 용기에 담겨 오는 짜고 달고 뜨거운 음식이 건강에 좋을 리 없다는 생각도, 항상 남게 되는 음식과 쌓여가는 플라스틱 쓰레기가 문제라는 생각도 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오랜 습관은 잘 고쳐지지 않았다. 언제나 식사를 준비하고 차려먹는 시간이 눈앞에 닥친 '해야 할 일'이나 휴식을 위한 시간보다 중요하지 않게 여겨졌다. 그렇게 자신을 홀대한 시간이 몸 구석구석에 쌓여 나를 병들게 한다는 걸 애써 모른 척 한 채로.  


올해는 마치 때가 되었다는 듯이 몸 여기저기가 아프기 시작했다. 속이 더부룩하거나 열흘 넘게 소화가 안 되기도 하고, 복통도 전보다 더 자주 찾아왔다. 면역력이 떨어지면 생긴다는 여러 염증들도 줄줄이 나타났다. 내 몸은 나에게 말하는 듯했다. 너 언제까지 그러고 살 작정이냐고. 마침 3월부터 회사 생활을 정리하고 프리랜서로 일하게 되면서 하루의 시간을 보다 유연하게 쓸 수 있게 되었다. 더 이상 시간 핑계를 댈 수는 없을 것 같아 미뤄두었던 밥솥을 사고, 쌀 10kg과 며칠 동안 먹을 싱싱한 식재료들을 샀다. 물을 마시기 위해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 남은 배달 음식이 아닌 채소와 계란, 김치가 보이면 그게 꼭 나의 의지 같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영회<리틀 포레스트> 스틸컷 (출처=네이버영화)

호기롭게 집밥을 만들어 먹겠다고 다짐했지만, 나에게 요리란 여전히 좌충우돌의 영역이다. D의 브이로그에서 보았던 가지 밥을 시도했다가 물 양을 조절하지 못해 두 번이나 실패를 했고, 멸치볶음을 만들 때는 프라이팬에 너무 오래 볶아 반찬이 아닌 과자처럼 되기도 했다. 그래도 하나씩 하나씩 할 수 있는 음식의 가짓수를 늘려가 보는 것은 좋은 재료를 고심해서 고르고, 씻고 삶고 졸이고 볶아서 한 끼를 준비하는 과정이 결국엔 나를 돌보는 시간이라는 D의 말을 이해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집밥 이미지 ⓒ클립아트코리아

하루는 이른 저녁을 먹으려고 오후 네시부터 요리를 시작했다. 메뉴는 된장찌개와 마늘쫑 볶음. 보글보글 끓는 육수에 된장을 풀고 미리 씻어서 잘라둔 애호박과 버섯, 두부를 넣었다. 찌개가 끓는 동안 내 손으로 처음 사 본 마늘쫑 한 단을 깨끗하게 씻어 먹기 좋게 잘라냈다. 휴대전화로 레시피를 확인하며 느릿느릿하게 양념장을 만들고 데친 마늘쫑과 함께 볶았다. 이번에는 태우지 않으려 부지런히 젓가락을 움직였더니 골고루 양념이 잘 배어든 듯 보였다. 마무리는 참깨를 아낌없이 뿌려 고소함을 더하기. 그리고는 D에게 선물 받은 하늘색 그릇에 갓 지은 밥과 마늘쫑을 넉넉히 담아 식탁에 올렸다. 옆에는 뜨거운 김이 오르는 된장국도 한 그릇. '잘 먹겠습니다!' 후후 불어 식힌 된장국 한 입에 마늘쫑 얹은 밥 한 숟갈을 같이 먹으니 줄 서서 먹을 만큼 놀라운 맛은 아니어도 꽤 맛있었다. 한 숟갈, 한 숟갈 비워져 가는 그릇을 보며 생각했다. 혼자 먹더라도 건강하게 챙겨 먹고, 네가 너를 홀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던 친구 D의 말을. 


아주 당연한 말인데도 내 몸은 내 것이라는 사실을 자주 잊어버리고 산다. 누구보다 나에게 잘 대해줘야 하는 사람 역시 나 자신이라는 것도. 그리고 무언가를 잊어버리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습관이 될 때까지 몸에 익히는 것이다. 일이 바쁘거나 컨디션이 저조한 날엔 곧바로 간편한 배달 음식을 떠올리게 되지만, 이전보다는 확실히 줄여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삶에서 중요한 우선순위를 바꿔보려는 노력이다.


어제는 SNS를 보다가 양배추와 두부, 토마토소스를 이용해서 만드는 양배추 롤 레시피를 보았다. 위가 좋지 않은 사람에겐 양배추가 좋다는 말이 떠올라 온라인 쇼핑몰에서 양배추 한 통과 토마토소스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시간 쓰는 일을 아까워하지 않는 것.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은 것. 사랑한다면 당연해지는 것들을 기꺼이 나에게 해주며 살아가고 싶다. 

 

김달님
좋아하는 이야기로 남은 시간과 사람들을 글로 적습니다.
세 권의 산문집 <우리는 비슷한 얼굴을 하고서>, <작별 인사는 아직이에요>, <나의 두 사람>을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