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아파트를 바라보는 새롭고 다양한 시선(정헌목 교수) 첨부이미지 : 썸네일10-6.png

*본 게시물은 주거 문화의 다양성을 주제로 외부 전문가가 작성한 칼럼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아파트는 가장 많은 사람이 거주하는 주택 유형이자 대다수가 소유하기를 원하는 상품이다. 다른 한편으로 아파트는 한국 특유의 획일적이고 단조로운 도시 경관을 만들어낸 주범인 동시에 높은 집값으로 대표되는 각종 사회문제의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어느 편이 되었든 현대 한국의 주거문화는 아파트가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의 근대화와 도시화가 결합해 탄생한 특유의 ‘한국적 산물’로서 아파트 단지는 한국 사회의 욕망이 투영된 결과물인 동시에, 한국인의 의식과 생활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온 매개물인 셈이다.

이 같은 한국의 획일적인 주거 현실에서 아파트 단지를 배경으로 등장한 새로운 형태의 문화적 재현과 실천은 그래서 더욱 주목할 만하다. 특히 아파트 단지를 ‘고향’으로 여기는 새로운 세대의 등장은 아파트를 둘러싼 흥미로운 결과물을 낳았다. 한국 사회에서 보통 전형적인 이미지의 고향이라고 하면 목가적인 풍경의 시골 마을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대략 1980년대생 이후의 세대에게 실질적인 고향은 바로 다름 아닌 아파트 단지이다. 많은 경우 이들은 실제로 아파트 단지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파트 단지를 고향으로 여기는 이른바 ‘아파트 키즈’ 혹은 ‘아파트 덕후’라 불리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이들을 중심으로 각종 독립 예술물 제작 등을 통해 아파트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는 문화적 실천이 등장한 것이다.

[안녕,둔촌주공아파트] 시리즈 ⓒ이인규

‘아파트 키즈’의 문화적 실천과 관련한 대표적인 사례는 독립 출판물 『안녕, 둔촌주공아파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1980년대 이후 태어난 이들에게 낡은 주공아파트의 재건축이라는 상황은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이 없어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한국 사회의 전통적인 관점대로 시골 마을이 고향이라면 아무리 변화를 맞이하더라도 그 동네 자체가 고향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반면 아파트 단지는 재건축을 하고 나면 새로 지어진 아파트를 더 이상 예전의 고향처럼 여기기 쉽지 않다. 그 이전의 오래된 주공아파트와 재건축 이후 건설된 신축 브랜드 아파트는 기본적으로 다른 물리적 경관을 지녔기 때문이다.

『안녕, 둔촌주공아파트』는 이런 배경에서 탄생했다. 2010년대 초반 서울시 강동구 둔촌동에 위치한 둔촌주공아파트가 재건축에 들어간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 아파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주민 한 분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고향’이 사라지기 전에 고향을 함께 보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으고 기록하는 작업이 진행된 것이다. 결국 과거 이 단지에 살았던 주민들의 구술과 재건축을 앞두고 살아가는 주민들의 이야기가 모여 『안녕, 둔촌주공아파트』라는 독립 출판물 시리즈가 나왔고, 이 작업에서 영향을 받은 비슷한 형태의 움직임이 재건축을 앞둔 다른 주공아파트 단지들에서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둔촌주공아파트를 소재로 한 영화 포스터(이미지 출처=네이버영화)

이 시리즈가 사회적으로 주목받으면서 출판물의 형태를 넘어 한국의 아파트를 다른 시선으로 다루기 시작한 영상물도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를테면 2018년에는 『집의 시간들』(2018, 감독 라야)이라는 독립영화가 개봉했다. 『집의 시간들』은 역시 둔촌주공아파트 단지를 주인공 삼아 이 단지에서 유년기를 보낸 사람들의 구술과 기억을 모아서 만든 독립영화로, 그 자체로 한 편의 민족지 영화(ethnographic film)로서 살펴볼 장면이 많은 작품이기도 하다. 인상적인 건 이 작품의 어디에도 인물 클로즈업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내레이션을 맡은 화자마저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는 이 작품의 주인공이 다름 아닌 아파트 단지 내의 풍성한 나무들로 대표되는 자연, 그리고 그 자연에 동화된 인공물로서의 아파트 단지라는 사실을 관객들에게 각인시키는 효과를 가져다준다.

이런 특징은 아파트를 다룬 또 다른 영상물인 『아파트 생태계』(2017, 감독 정재은)라는 작품과 비교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한국의 도시가 아파트 중심의 말 그대로 ‘아파트 생태계’로 변모하는 과정에 관여했던 사람들의 역할을 자세히 그려낸 작품이 『아파트 생태계』라면, 아파트 키즈가 중심이 되어 제작된 『집의 시간들』은 화면에 보이지 않는 화자들을 통해 아파트 단지에 주인공으로서 목소리를 부여한다. 두 작품 모두 한국 사회에서 아파트를 보는 새로운 관점의 등장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이어 2022년에는 둔촌주공아파트 재건축을 앞두고 진행된 ‘길고양이 이주 프로젝트’를 다룬 『고양이들의 아파트』(2022, 감독 정재은)가 개봉하며 아파트 단지가 인간과 건물뿐만 아니라 다양한 동물이 공존하는 장소임을 드러내 줬다. 이 같은 다양한 움직임은 아파트를 사고파는 상품으로만 보는 한국 사회의 전형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아파트 역시 다양한 문화적 실천의 무대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들이다.

 

정헌목
도시공간과 주거, 공동체를 연구하는 인류학자. 도시화를 비롯한 현대 한국의 사회적 변동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문화 현상을 연구해 왔다. 지은 책으로 <가치 있는 아파트 만들기>와 <마르크 오제, 비장소>가 있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류학전공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