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의 <기생충> 칸국제영화제 그랑프리와 미국 영화아카데미 작품상 수상, 넷플릭스 <오징어게임>의 세계적인 열풍 그리고 에미상 작품상과 남우주연상 수상 등등. 이제 한국의 대중문화는 변방이나 마이너에서 즐기는 독특한 문화가 아니라 서구를 포함한 세계의 많은 대중이 열광하고 흥미를 느끼는 메이저 문화로 자리 잡았다. 아시아에서도 강대국 일본과 중국의 그림자에 가려 있던 한국이 문화 강국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한류라는 말이 처음 나온 것은, 2002년 <겨울연가>가 일본에서 인기를 끌면서였다. 일본 공중파에서 한국 드라마를 방영하고, 각종 예능 프로에 한국 배우와 뮤지션이 출연했다. 40대 이상의 여성들만 열광하는 잠깐의 유행이라는 분석도 있었지만, 한국 드라마와 대중음악은 일본에서 꾸준하게 인기를 끌었다. 강력한 마이너 문화로 점점 영향력을 키워갔다.
드라마 <겨울연가> 일본 포스터 ⓒNHK
2017년 6월 ‘스포츠경향’에 일본의 공중파 방송국인 TBS 나가오 아키라 PD의 인터뷰가 실렸다. 국제부 한류 담당부장이고, 2008년부터 2014년까지 한국 드라마를 구매하고 공동제작을 했던 전문가다. ‘도깨비가 와도 일본내 한류 영광 다시 없다’는 선정적인 제목의 기사에는 ‘일본에서 한국 드라마는 하위문화, 마니아적 문화다’라는 발언도 있었다. 메이저가 될 수 없다는 부정적인 주장이었다. 그러나 한일관계가 냉각되면서 일시적으로 위축되기도 했지만, 정치에 관심이 없는 일본의 10대, 20대를 중심으로 한국의 대중문화는 점점 퍼져갔다. BTS와 트와이스 등 K팝과 <사랑의 불시착>, <이태원 클라스> 등 드라마를 포함한 문화콘텐츠와 함께 음식, 화장품, 패션, 문구 등에서도 한국 제품이 인기를 끌었다. 시부야의 타워레코드에서는 한 층을 K팝 매장으로 꾸몄고, 도쿄의 한인타운이라 할 신오쿠보는 일본의 젊은이들이 만나 한국음식을 먹는 핫플레이스가 되었다. 일본에서 10대와 20대 여성이 많이 사용하는 트위터에서 ‘한국인이 되고 싶어’가 트렌드로 뜨기도 했다.
(좌)<이태원 클라쓰> 포스터(ⓒJTBC), (우)<사랑의 불시착> 포스터(ⓒtvN)
1990년대의 한국은 앞서가는 일본의 문화를 베끼며 성장했다. 당시 J팝과 J드라마는 동남아에서 최정상의 인기를 누렸다. 일본문화가 금지였던 한국에서는 J팝과 J드라마를 불법적으로, 그러나 공공연하게 즐겼다.
영화 ‘러브레터’ 스틸컷. 제이앤씨미디어그룹 제공
이와이 슌지의 <러브레터>는 당시 대학가 상영회의 단골 영화였다. 젊은이들은 <논노>와 <앙앙> 등에 나오는 패션을 따라 했다. 일본 노래를 베끼고, 방송 프로그램의 포맷을 그대로 가져오는 것도 어두운 관행이었다. 이제는 반대다. 일본의 젊은이들이 한국의 화장품을 바르며 패션을 따라 하고, K팝을 부르며 춤을 춘다. 일본 넷플릭스의 인기 순위에는 한국 영화와 드라마가 상위 10개의 절반이 넘는다. 이제 일본의 한국문화는 메이저가 되었다.
2023년 일본 넷플릭스 시리즈 top10 순위(3월 1주 조회) 출처=FlixPatrol 차트 캡처
K컬처는 옆 나라 일본을 넘어 세계의 메이저로 우뚝 섰다. <올드보이>와 <살인의 추억>, <곡성> 등 한국영화를 좋아하는 해외의 팬들은 말한다. 강렬하고, 깊숙하고, 찐득하다고. 그걸 정과 한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한국의 근현대사는 너무나 빠르고, 너무나 처절하다. 한의 정서와 드라마틱한 속도가 한국 콘텐츠에 고스란히 투영됐다. 장르적이면서도 리얼하다. <오징어 게임>은 코로나 팬데믹 이후 심화 되는 빈부격차에 대한 선정적인 고발이 호응을 얻었다. <오징어 게임>의 인물들은, 지금 내가 존재하는 사회에서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현실적인 캐릭터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과 맞닿아 있고, 그렇기에 시청자는 더욱 공감한다.
(좌) 드라마 <파친코> ⓒ애플tv+ (우)영화 <미나리>(제공=판씨네마㈜)
김기덕과 홍상수, 이창동으로 대표되었던 한국영화는 머나먼 변방의 이국적인 영화를 좋아하는 시네필에서 격렬하고 에너제틱한 장르물을 원하는 다수의 대중으로 확장되어왔다. <기생충>의 성공은 한국영화가 소수 시네필의 전유물이 아님을 확언했다. 세계인 다수가 즐길 수 있는,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인 주류 문화가 되었음을 <기생충>이 보여주었다. 그것은 단지 정서나 캐릭터 때문만이 아니다. 윤여정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은 <미나리>와 일제강점기 재일교포의 삶을 그린 <파친코>는 한국적이라는 것만으로 높은 평가를 받지 않았다. <미나리>와 <파친코>는 보편적인 주제와 정서를 건드린 수작이다.
넷플릭스 시리즈 <디피>, <피지컬 100> ⓒ넷플릭스
넷플릭스를 통해 <오징어게임>을 비롯하여 <킹덤>, <스위트 홈>. <디피>, <정이> 등의 드라마와 영화 그리고 예능인 <피지컬 100>까지 세계인이 열광하는 콘텐츠들이 줄줄이 만들어지고 있다. 그동안 한국에서 거의 만들지 않았던 새로운 소재의 콘텐츠들은 새로운 강렬함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넷플릭스의 힘이 컸다. 자유롭게 새로운 이야기에 도전하게 만들어준 플랫폼 덕에 한국의 뛰어난 콘텐츠 제작 역량이 최고의 시너지 효과를 낸 것이다
제64회 그래미 시상식에서 '버터(Butter)' 곡으로 공연을 펼치는 BTS [출처=로이터)
한국은 에너제틱한 사회다.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순식간에 많은 것들이 변화해 왔다. 그리고 세계의 모든 것을 흡수하여 우리만의 것을 만들어낸다. 영화와 드라마만이 아니다. 일본 아이돌을 따라 시작했던 한국의 아이돌은 힙합이 더해지면서 세련된 스타일로 재창조됐다. 한국의 아이돌은 세계로 가고 있지만, 일본의 아이돌은 여전히 내수용일 뿐이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일본은 안정된 내수시장 안에서 확실한 성공전략을 따라간다. 한국은 인구가 적기 때문에 늘 해외 시장을 생각하며, 보편성 속에서 새로운 영역에 도전한다. 물론 일본의 예에서 보듯, 잘 나가는 K-컬처도 한순간에 부진에 빠질 수 있다. 제작환경이 보수적이 되면 새로운 모험을 하지 않고, 아이디어와 스토리에 자체 검열을 하며 익숙한 길만을 걸어갈 때 문화의 힘은 사그러든다. 한국은 늘 급변하는 사회에서 계속 새로운 것을 찾아 치열하게 경쟁하며 성장했다. 자유롭게, 미래를 생각하며 창조한다. K-컬처의 힘이다.
김봉석
대중문화 평론가, <씨네21>, <브뤼트>, <에이코믹스> 등의 매체와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프로그래머를 거쳤다. 어린 시절부터 영화, 소설, 만화를 좋아했고 어른이 되어서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자연스레 대중문화평론가, 작가로 활동하며 『나의 대중문화 표류기』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내 안의 음란마귀』 『좀비사전』 『탐정사전』 『나도 글 좀 잘 쓰면 소원이 없겠네』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