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너멍굴을 선택했나?(MZ세대 청년농부 진남현) 첨부이미지 : 썸네일12-3.png

 

문화다양성 인터뷰

문화다양성 인터뷰 시리즈에서는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문화다양성 가치 확산을 위해 매월 특정 주제와 관련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질문하고, 그 생생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이번 인터뷰에서는 <나는 너멍굴을 선택했다> 책을 발간하기도 한 MZ세대 농부 진남현님을 만나봤습니다

 

1.안녕하세요.  간단한 자기 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진남현입니다. 저는 완주군 고산면에서 우리 땅에 맞는 토종종자를 찾아, 자연농법으로 농사를 짓고 있는 7년차 농사꾼입니다. 27살에 혈혈단신으로 시작한 산골생활이지만, 지금은 부부가 되어 두 딸아이와 함께 대가족을 이루고 너멍굴에서 삶을 가꾸고 있습니다.

 

2. 대학 졸업 전귀농을 했습니다과감하게 귀농을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농사를 지으면 굶어 죽지는 않을 것 같았습니다. 사람이 사는데, 먹고 입고 방 한 칸 있으면 되는데, 농사를 직접 지으면 먹는 것은 문제가 없겠다 하였습니다. 아주 치기 어린 생각이었습니다. 지금 와서 ‘다시 할 수 있겠냐?’ 한다면 고민이 좀 더 필요할 것 같은 무모함이었습니다. 그래도 덕분에 이렇게 살아남아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농사를 짓겠다는 생각은 고등학교 때부터였습니다. 바로 농사짓고 싶었지만, 운 좋게 대학에 붙어서, 대학물도 한 번은 마셔봐야지 그랬습니다. 그렇게 사학과에 진학해서 신나게 먹고 놀다가 이 정도면 놀만큼 논 것 같아서 내려왔습니다. 어차피 흙에 뒹굴며 살려고 하는데 졸업장은 큰 의미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저에겐 졸업은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3. 귀농을 결심하고서 특별히 너멍굴에 정착하게 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너멍굴 풍경ⓒ진남현


자유롭고 싶었습니다. 너멍굴은 사람이 살지 않는 마을 너머에 있는 산골짜기였습니다. 그런 곳이라면 다른 사람들 눈치 보지 않고 소리도 지르고, 해보고 싶은 것들도 해보지 않겠나 생각했어요. 때마침 그곳에서 유기농으로 20년도 넘게 농토를 일구시던 어르신이 힘에 부쳐서 농지를
내어주셨습니다. 천운이었습니다. 풍경도 좋고, 사람만 없고 모든 게 있는 땅이라는 게 좋았습니다.

 

4. 지역에서는 청년들의 일자리가 없어 서울로 향하는 청년들이 대부분인데오히려 서울에서 귀농을 택하셨습니다농촌의 삶에서 무엇을 얻고 배우셨는지 궁금합니다.

사람 사는 것은 다 거기서 거기다이것을 느꼈습니다. 아무리 가진 것이 많은 사람도, 형편이 쪼들려 하루하루가 힘든 사람도 밥을 먹고 사는 거잖아요. 뭐 누구 밥은 흙이고, 누구 밥은 금이고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저 건강한 음식 배불리 먹고, 따뜻한 방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살 수 있으면 만족합니다.

 

5. 농촌에서는 문화생활을 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너멍굴에서 다른 청년들과 힘을 모아 영화제를 기획하게 된 이유와 과정을 들려주신다면?

처음에는 농사짓는 방법을 찾으며 실패를 많이 했어요. 그래서 넓은 땅이 맥없이 몇 년 놀았습니다. 마침 영화감독을 하는 대학 후배가 영화를 만들어도 상영할 곳이 많이 없다고 하길래, 여기서 보고 싶은 영화들 모아서 봐보자 하는 것이 시작이었어요. 그래서 노는 땅에 풀 깎고, 앉을 곳 만들고 상영기를 걸어서 영화 같이 보는 날을 만든 것이 영화제를 몇 년 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는 문화생활이라는 게 여유가 있어야 시작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우선 쉬어야 문화생활을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는데요. 그래서 우선 볕 좋고, 때 좋은 날에 일을 딱 내려놔요. 그러면 그 순간부터 별 노력을 안 해도 문화생활이 딱 시작되더라고요. 일하기 좋은 날, 해야 할 일을 내팽개치고, 가족들이랑 동물원도 가고, 미술관도 가고, 산에도 가고 하면 엄청 달콤하잖아요.

ⓒ너멍굴 영화제

 

6. 2017-2018년 동안 직접 집을 지었다고 들었는데요직접 집을 짓기로 결심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제가 2016년에 첫 농사를 아주 크게 망했습니다. 마을에서 ‘우리 마을에서 농사가 시작된 이래 최대의 흉작’이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왜 망했을까 생각해 보니까 집이 농토와 멀어서 그런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다음 해엔 내가 경작하는 땅 바로 앞에 사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는 확고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건장한 남자 혼자 살 때니까요. 집이라는 것이 거창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일하고 들어와 누울 방 한 칸을 만들자고 시작된 것이 2년 동안 집을 짓는 고행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직접 지은 집ⓒ진남현

 

7. 집을 지으면서 겪었던 시행착오와 집을 완성했을 때의 기분을 들려주신다면?

처음에 한 달하고 보름이 걸려서 방한 칸을 만들어서 그곳에서 딱 잠이 들 때의 기분은 기가 막혔습니다. 천하가 내 손안에 있는 것 같은 오만한 마음과 극도로 자유로움을 느끼는 상태로 잠들었습니다. 하지만 집이라는 게 그렇게 뚝딱 지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처음 방 한 칸은 조금 있으니까 비 새고, 쥐와 뱀이 옆에서 기어 다니는 참혹한 공간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어서 옆에다 다시 방 한 칸을 지었어요. 그 방도 문제가 생기면 잘못된 부분을 개선해서 또 옆에 방한 칸 짓고, 그렇게 시간이 쌓이니까 머리와 몸에 집을 만드는 것이 들어오더라고요. 차츰차츰 살만한 공간으로 바뀐 게 2년 정도 흐르니까 되었습니다. 지금도 집은 계속 고치고 새로이어내 가면서 살고 있어요. 관 뚜껑 닫히면 끝나는 거죠.

8. 청년들이 농촌에서 뿌리내리기 위해 필요한 조건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제가 아직 조언을 할 위치에 있지 못합니다. 굳이 제가 지내온 시간에서 끄집어낸다면, 저 같이 아무것도 없는 놈도 하는데 못할 것은 없다. 그 정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9. 농촌에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도시에서도 육아는 쉽지 않은데아이가 태어난 이후의 삶은 어떻게 변화했나요?

ⓒ진남현

집에 온기가 생겼습니다. 아기가 없을 때는 집이 좀 추웠거든요. 그런데 아이가 생기니까 똑같은 공간이어도 더 따뜻하게 하고 깔끔하게 관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방에 들어가면 따뜻한 훈풍이 돌고, 향긋한 향이 올라오고 그렇게 변했습니다.

또한 농토를 바라보는 눈도 바뀌었습니다. 전혀 상관이 없는 일로 보이지만, 농사도 육아도 생명을 가꾸는 활동이라는 게 아주 같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보다가 밭으로 가면 농토에서 자라나는 생명이 똑같이 느껴져요. 그렇게 마음이 달라지니까 그전에는 거친 노동으로만 다가오던 일들이 정성을 다하는 유희로 바뀌어 갑니다. 어른들이 ‘내 자식처럼 키웠다.’라고 말씀들 하시는 이유를 이제 알았습니다.

 

10.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은 없으신가요나중에 가족과 함께 살고 싶은 미래의 집은 어떤 모습인가요?

불안감은 크게 없습니다. 다 어떻게든 살아지게 되어있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만 있으면 되지 않을까요. 지금처럼 가진 것은 좀 적어도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욕심부리지 말고, 멈출 줄도 알고, 여유 부릴 줄도 알고 그렇게요.

이제 아이들이 커가니까요. 지금처럼 단칸방에서는 몇 년 못 살 것 같습니다. 조금 더 넓은 집 한 칸, 제 손으로 짓는 것이 지금의 목표입니다.

 

진남현
1990년생 귀농 청년.
경희대학교 사학과에서 수학했으나 농사꾼에게 졸업장은 필요 없겠다 싶어 스물여덟이 되던 해 전 재산 100만 원을 들고 완주로 귀농하였다. 귀농 후 문전옥답을 찾아 사람이 살지 않는 골짜기인 너멍굴로 들어갔고, 그
곳에서 7년째 살고 있다. 
현재 너멍굴에서 토종 씨앗과 무자본 농법으로 1800평의 농토를 경작하고 있다. 미세먼지가 온 산천을 뒤덮
지 않는 한 이곳에서 여생을 보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