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숨결이 담긴 바게트 (정연주 작가) 첨부이미지 : 썸네일9-6.png

*본 게시물은 미식 여행에서 발견한 식문화의 다양성을 주제로 외부 전문가가 작성한 칼럼입니다.

미식 여행 중 시장과 장바구니에서 발견할 수 있는 문화의 차이

세계 어느 나라로 미식 여행을 떠나든 꼭 들리는 장소가 있다. 바로 시장, 그리고 마트다. 시끌벅적한 시장 속 상인과 손님의 대화를 듣고 깔끔한 마트 진열대의 색다른 제품 라인업을 살펴볼 때면 내가 지금 다른 나라, 낯선 문화권에 들어와 있다는 실감이 난다. 신선 코너를 장식한 채소와 과일도 본 적 없는 것이고, 주변 행인은 나로서는 어떻게 먹는지 알 수 없는 양념과 고기를 집어 든다.
장바구니를 보면 그 나라의 삶과 문화를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나에게 그간의 모든 여행을 통틀어 가장 직접적으로 풍성한 미식 문화를 극명하게 보여준 음식은 파리를 대표하는 아이콘처럼 기능하는 장바구니 속 길쭉한 빵, 바게트였다.

(좌) 파리의 마트 풍경, (우) 파리의 바게트 ⓒ정연주

파리를 대표하는 빵바게트

샤를드골 공항에 내리기 전까지 나에게 바게트는 까다롭고 새침한 콧대 높은 빵이었다. 매년 열리는 ‘그랑프리 드 라 바게트’ 대회에서 우승하면 엘리제 궁에 일 년간 바게트를 공급하는 영예를 얻고, 들어가는 재료도 길이도 법으로 정해져 있다고 한다.(‘전통’ 바게트일 경우). 아무리 그래도 식사빵인데 조금 난리법석이지 않은가. 하지만 일단 파리 전역에 널린 맛있는 바게트를 맛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평균 1유로 정도의 가벼운 가격에 무엇보다 감탄스러운 것은 맛. 구운 후 4시간여까지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는 부드럽고 촉촉한 속살과 바삭바삭하면서 담백한 맛의 스펙트럼 속에서 최대한의 고소함을 발휘하는 겉껍질 풍미의 대조는 정말 법으로 지켜야 마땅하다 싶은 맛이다.

현지인들의 바게트를 대하는 태도그리고 이상적인 맛의 환경

이런 바게트를 대하는 현지인의 태도에는 예상치 못한 부분이 있다. 물론 바게트를 손에 넣기 전까지의 엄격함, 고집스러움은 고정관념 속 까다로운 파리지앵과 같다. 시장 투어의 현지인 가이드는 마르쉐 앞 블랑제리를 소개하면서 바게트로 상을 받았지만 사실 크루아상이 더 맛있고, 바게트는 길 건너 가게를 시간 맞춰 방문해 구입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우리가 그날 맛본 바게트는 물론 길 건너 블랑제리에서 갓 구워내 껍질이 아직 따끈따끈한 것이었다.

마켓 투어에서의 바게트 ⓒ정연주

하지만 일단 손에 든 바게트를 대하는 태도는 무심하다. 우리에게 프랑스 맥주를 한 잔씩 돌린 가이드는 주머니에서 아미 나이프를 꺼내 바게트를 반쯤 뜯어내듯이 잘라내서 수북하게 담아 치즈 접시와 함께 내밀었다. 지인의 집에서의 저녁 식사에서도 상황은 비슷했다. 퇴근길에 골라온 길쭉한 바게트를 한 손에 든 집주인은 허공에서 빵칼로 썰듯이 잘라내 식탁 가운데에 턱 하니 차려냈다. 둘 다 매우 비슷한 결의 시크한 바게트 퍼포먼스였다.
우리를 위해 정육점 주인이 오늘 가장 맛있는 부위로 골라줬다는 안창살 스테이크를 먹고 인근에서 가장 맛있는 파테 가게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이 도시에서 경험하는 자연스러운 바게트와의 공존이 부럽다고맛있는 바게트를 모두가 함께 지키고 만들고최상의 맛을 일상처럼 즐기는 삶꿈꾸는 이상적인 맛의 환경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온라인 장바구니 속 밀키트와 파리의 바게트

언택트 시대를 맞이해 우리나라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 재빠르게 디지털 문화에 적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매년 유의미하게 성장하는 새벽 배송 시장에서 잘 드러난다. 직접 마트를 가고 장을 보는 시간을 절약해서 잠들기 전 온라인 쇼핑몰 장바구니를 비우면, 다음 날 아침 출근하기 전에 이미 문 앞에 식료품이 도착해 있다.
한번 이용해보면 쉬이 과거로 돌아가기 힘든 편리함이다. 온라인 장바구니에는 언제나 클릭 한 번으로 담아둔 새로 나온 밀키트가 가득 차 있다. 마지막으로 장바구니를 들고 장을 본 것이 언제였던가? 여유롭게 진열대 사이를 거닐고, 나와 가족을 먹일 음식을 생각하던 순간이 까마득하다.

여행을 떠나면 낯선 곳에서의 새로운 경험을 통해 지금까지 살아온 내 모습을 돌아볼 여유가 종종 생긴다. 현실에 매몰되어 지쳤음을 깨달을 때, 나는 마지막 파리 여행에서 집어 든 바삭바삭한 바게트를 떠올린다. 그리고 생각한다. 온라인 장바구니의 밀키트 말고 에코백 장바구니에 꽂힌 바게트를 만나고 싶다고.

 

정연주
요리하는 작가, 푸드 에디터, 요리 번역가. 르 꼬르동 블루에서 프랑스 요리를 공부하고, 요리 잡지 <CookAnd>에서 에디터로 근무했습니다. ≪용감한 구르메의 미식 라이브러리≫, ≪빵도 익어야 맛있습니다≫, ≪프랑스 쿡북≫ 등을 옮겼고 ≪아니요, 그건 빼주세요≫에 작가 1인으로 참여했으며 ≪온갖 날의 미식 여행≫을 썼습니다.
언제나 음식과 요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다양한 경험과 위로, 여유를 전하고 공유하는 푸드 콘텐츠를 생각하고 만들어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