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 간의 반목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그런데 최근 나랏일 하나를 결정하는 사이에 어째 골이 더 깊어졌다. 서로 물고 뜯고 할퀼 일이 아니건만 아예 눈조차 마주칠 생각을 안 한다. 이럴 때 의미 있고 따뜻한 드라마 한편이 등장해 불통의 벽을 허무는 데 한 몫 해주면 좋으련만 마땅한 작품이 눈에 띄지 않는다.
세칭 ‘MZ’들은 중·장년층 이상이 선호하는 드라마를 보며 비웃는다. 사실 그럴 만도 하다. “진보한 디자인은 박수를 받지만 진부한 디자인은 외면당합니다.” 온스타일 <프로젝트 런웨이 코리아>, 진행자 이소라의 오프닝 멘트다. ‘진부하다‘는 낡아서 새롭지 못하다는 뜻으로 주로 부정적으로 쓰인다.
▲(좌)드라마<신사와 아가씨>,(우) 결혼작사 이혼작곡 시즌3 (출처=KBS, TV조선)
그러나 드라마에서 만큼은 예외다. 빤한 내용이 오히려 성과가 좋다. 최근 종영한 KBS2 주말극 <신사와 아가씨>가 좋은 예다. 시청률 기근이라는 지상파 방송에서 내내 30 퍼센트를 훌쩍 넘는 시청률로 주인공 지현우에게 연기 대상까지 안겨준 이 드라마. 출생의 비밀, 외도, 불치병은 기본이고 거기에 가정 폭력이며 러브라인 범람까지, 온갖 갈등 요소를 버무린 진부함의 절정이었다. 매 화 보는 이들의 뒷목을 잡게 만들었음에도 시청률은 고공행진이었으니 유구무언이랄 밖에.
무려 ‘시즌 3’로 접어든 TV조선 <결혼작사 이혼작곡>은 또 어떤가. 개연성 없는 전개의 달인 임성한(피비) 작가가 이번엔 귀신을 한 집안으로 부족했던지 두 집안에 등장시켰다. 뿐만 아니라 한 발 더 나아가 어째 영혼결혼식까지 등장할 조짐이다.
왜 진부하고 개연성 없는 드라마들이 외면은커녕 오히려 좋은 성적표를 받는 걸까? 짐작건대 목표가 확실해서다. 시청률을 좌지우지하는 중장년층 이상의 연령대가 흥미를 느낄만한, 별 고민 없이 마음 편히 볼 수 있는 내용을 모아, 모아 놓았기 때문이지 싶다는 얘기다.
재밌는 건 드라마 단골 소재인 ‘외도’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전에는 남편이 바람이 나면 친구나 언니, 시누이 등 주변인들이 떼로 몰려가 일명 상간녀를 혼쭐을 내는 장면이 흔히 나왔다. 여자가 먼저 꼬리를 쳤으리라는 전제 하에 상대 여성부터 때려잡고 보는 것이다. 머리끄덩이를 잡고 세간을 다 때려 부수고 동네방네 망신을 주고 난리법석이 한판 벌어진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남편의 여자가 맹랑하니 적반하장으로 나와도 떼 지어 몰려가기는커녕 초연하니 자존심을 지키는 경우가 태반이다. 뿐만 아니라 아내와 남편의 여자가 공조하기도 한다. 남자를 인간쓰레기로 설정해놓고 여자 둘이 힘을 모아서 처절하게 응징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이와 같은 설정의 드라마를 꼽아보자면 우선 지난해 방송된 화제작 tvN <마인>, <하이클래스>, 올 1월에 종영한 채널A <쇼윈도:여왕의 집>, 가장 최근에 종영한 JTBC <공작도시> 등이 디테일은 다르나 어쨌든 같은 방향의 전개다.
▲(좌)드라마<공작도시>,(우) 드라마<마인> (출처=JTBC, tvN)
이렇듯 아내와 남편의 여자가 공조하거나 서로를 측은히 여기는 일종의 유행 속에서 <신사와 아가씨>는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다. 단단(이세희)이의 아버지 박수철(이종원)이 전처이자 단단이 친모인 애나킴(이일화)을 여전히 만나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한 현재 처 차연실(오현경)이 애나킴의 머리채를 잡은 것이 벌써 몇 차례인가. 남편이 전처에게 미련이 남았음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왜 헤어질 결단을 못 내리는지 답답한 노릇이다. 애나킴이 췌장암으로 6개월 밖에 못 살기 때문에 돌봐줘야 한다는 건 구실이라는 걸 왜 모르는지. 손예진과 전미도의 차기작으로 주목을 받았던 JTBC <서른아홉>의 정찬영(전미도)도 애나킴과 마찬가지로 췌장암으로 인한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 다른 점은 애나킴은 3기, 정찬영은 4기라는 정도. 각기 다른 여자의 남편에게 의지한다는 점에서 또 마음은 주고받지만 선은 결코 넘지 않았다는 점에서, 자신들 사이는 깨끗하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한 치도 다르지 않다. 아내가 둘 사이를 의심하며 전전긍긍하는 순간에 시한부 판정 소식을 전한다는 것 역시 같았다.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했지만 실은 피치 못할 사연이 있었다는 식으로 빠져나갈 서사를 만들어주는 설정, 참으로 별로다. 겉으로는 젊은 감성의 드라마지만 <서른아홉>이 이삼십 대의 큰 호응을 받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드라마<스물다섯 스물하나> (출처=tvN)
그렇다면 요즘 이삼십 대가 즐겨보는 드라마는 과연 진보한 드라마일까? 최근 젊은이들 사이의 화제작은 단연 tvN <스물다섯 스물하나>다. 많은 이에게 크나큰 상처를 안긴 IMF가 시대배경이지만 그렇다고 한 때 유행이었던 복고 드라마들처럼 단순한 추억 나열에 그치지는 않는다. 물론 90년대 얘기인 만큼 순정만화 <풀하우스>, PC통신 채팅 친구, 오렌지족을 대변하는 빨간 머스탱 등이 등장하고 수시로 그 시절 그 노래들이 흘러나오지만 추억에 젖게 하기보다는 현실의 벽을 뛰어넘어 또 다른 세계로 이끌기 위한 장치로 쓰일 뿐이다. 막장 요소인 외도, 출생의 비밀, 음모, 함정, 복수 따위는 눈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을 뿐 아니라 풋풋한 청춘남녀가 주인공이지만 삼각관계가 아니라는 점도 신선하다,
드라마<스물다섯 스물하나> (출처=tvN)
주인공들이 우여곡절 끝에 50화에 이르러서야 겨우 서로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었던 <신사와 아가씨>와 견주면 신선하다 못해 청량하지 뭔가. 또 하나, 주인공 외에는 죄다 병풍을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여느 드라마들과는 달리 <스물다섯 스물하나> 속 캐릭터들은 대부분이 각자의 서사를 가지고 있다.
드라마<스물다섯 스물하나> (출처=tvN)
드라마<스물다섯 스물하나> (출처=tvN)
그것도 풍성한 사연을. 무엇보다 아이들이 존경할 어른들이 다수 등장해서 좋다. 올바른 스승의 길을 열어 보이는 나희도(김태리)와 고유림(보라)의 펜싱 코치 양찬미(김혜은)를 비롯해서 희도와 유림의 아버지 어머니도 각자 하는 일도 가치관도 다르나 자식에게 한 점 부끄러울 게 없는 부모들이다. 특히 학우들을 무차별 폭행해온 학생주임과 대치 끝에 수능을 한 달 앞두고 자퇴를 결심한 전교 1등 지승완(이주명)의 어머니(소희정). 딸을 믿고 지지해주는 배포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파릇파릇 새싹이 돋는 4월에는 또 하나의 희소식이 있다. <디어 마이 프랜즈>의 노희경 작가와 <나의 아저씨>의 박해영 작가가 같은 날 돌아오기 때문이다. 4월 9일에 노희경 작가는 tvN <우리들의 블르스>로, 박해영 작가는 <나의 해방일지>로. 부디 가족이 한 자리에 모여 드라마 한 편으로 수다를 떨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