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슈렉2>의 한 장면 ⓒ드림웍스
“그래서, 왕자와 공주는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Happily ever after, “그 후로도 행복하게” 정도로 번역되는 말이다. 오랫동안 ‘결혼’과 ‘행복’, ‘사랑의 완성’, ‘인간적 성숙’은 하나의 완전무결한 패키지 상품이었다. 결혼을 해야 모든 절차를 ‘클리어’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제 우리는 안다. 결혼은 성장의 완결이 아니고, 살아가는 이상 현실에는 ‘엔딩’이 없다는 것을. ‘해피’ 역시 결혼이라는 상태에 고착되어 머무는 관념이 아니다. 시대에 따라 행복의 정의와 사랑의 의미는 변한다. 결혼에 투영되는 욕망과 결혼이 상징하는 것 역시 바뀐다. 더 이상 결혼이라는 필터 하나로는, 나를 둘러싼 세계를 행복만이 가득한 세계로 여과할 수 없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오랫동안 결혼의 환상을 부추겨온 드라마와 예능에서도 포착할 수 있다.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스틸컷 ⓒMBC
올해 1월 종영한 <옷소매 붉은 끝동>(2021, MBC) 는 정조(이준호 분)와 궁녀 덕임(이세영 분)의 사랑을 다룬 사극이다.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며, <이산>(2007, MBC)이 정조의 파란만장한 정치 일대기를 다루었다면 <옷소매 붉은 끝동>은 정조와 덕임의 서사에 초점을 맞춘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이야기는, 왕과의 사랑이라는 커다란 해일 앞에서 선 궁녀 덕임이 자기 자신을 지키고자 고군분투하는 서사다. 드라마의 대표 카피는 다음과 같다. “왕은 궁녀를 사랑했다. 궁녀는 왕을 사랑했을까?” 정조의 유일한 승은 후궁인 의빈 성씨가 정조를 오랫동안 거절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유명하다. <이산>에서 의빈 성씨와 정조의 사랑이 지연되는 이유는 불안한 정조의 정치적 기반 때문이다. 반면 <옷소매 붉은 끝동>은 그동안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궁녀, 덕임의 ‘욕망’을 쫓아간다. 궁녀는 왕의 여자다. 궁녀에게는 왕을 거절할 권한이 없다. 왕은 요구하고, 궁녀는 받들어야 한다. 궁녀라면 누구나 왕의 사랑과 신분 상승을 꿈꾼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덕임은 이를 원하지 않는다. 승은 상궁 또는 후궁이 되면 더는 자기 자신으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스틸컷ⓒMBC
덕임은 궁녀라는 자신의 직업과 삶을 사랑한다. 여성이 직업을 거의 가질 수 없었던 시대, 유일한 여성 공무원에 해당하는 궁녀였기에 돈을 모아 어릴 적 헤어진 오빠를 뒷바라지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성장한 궁녀 4인방은 덕임이 때로 정조보다 우선시할 만큼, 덕임의 가족이나 다름없다. 덕임이 가장 잘하는 것은 글 쓰고 사람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것이다.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스틸컷ⓒMBC
그런데 왕의 승은을 입으면, 덕임의 욕망과 재능은 무의미해진다. 왕과의 결혼이 경력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다. 후궁은 왕을 기다리는 게 유일한 업무이고, (정순 왕후처럼) 혈육이 죽어도 갈 수 없는 처지다. 모두가 욕망하며 좋다고 평가하는 삶과, 누군가에게는 초라해 보이고 수시로 ‘궁녀 따위’라고 무시당할지언정 자기 자신의 존엄을 지키는 소박한 삶 사이에서 덕임은 거침없이 후자를 선택한다. 드라마 방영 당시, 도대체 덕임이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는 의견과 덕임을 이해한다는 의견이 팽팽하게 맞섰다. 사랑하면 응당 맺어져야 하고, 맺어졌다면 사랑의 지속 가능성을 증명하는 결혼으로 끝나는 것이 익숙한 전개였다. 이 지점에서 일부 시청자들의 거부감이 발생했다. 동시에, 하나를 선택함으로써 자기 자신으로 살고자 하는 의지와 지금껏 발 딛고 있던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고통을 아는 시청자들은 덕임에 깊이 이입했다.
결혼으로 일약 신데렐라가 되는 것, 신분 차이를 극복하는 사랑은 지금껏 무수한 로맨스의 가장 강렬한 골인 지점이었다. 이 좋은 것을 거부하는 여자는 없다는 믿음이 진짜인 양 유통되었다. 선택권을 쥔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그가 최우선으로 삼는 가치는 무엇인지 묻지 않은 채 말이다.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덕임은 결국 승은을 입는다. 이 장면은 분명 행복한 사건이지만, 전체적으로 비극적이고 처연한 분위기로 연출된다.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스틸컷ⓒMBC
승은 상궁이 된 후에도 궁녀들과 섞여 잡일을 하던 덕임은 회임하면서 후궁으로 승격한다. 그리고 궁궐 밖으로 나들이 나가는 친구들을 보며 눈물을 흘린다. 자유롭던 궁녀 시절의 덕임이 친구들과 어울려 멀어지며, 덕임의 표현대로 평생 ‘구중궁궐’에 갇혀 살게 된 의빈 성씨에게 손을 흔든다. 덕임은 이전의 자신과 완전히 결별한다. 정조는 덕임을 사랑하며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았으나 덕임은 사랑 외의 모든 것을 잃었다. 덕임은 천천히 병들어 가다 일찍 죽는다. 덕임이 궁녀로 계속 살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왕을 사랑하면서도 평범한 사내와 여인이었기를 바랐던 덕임은, 왕에게 자신을 정말 사랑한다면 다음 생에는 옷소매도 스치지 말고 지나쳐 가달라고 부탁한다. 사랑과 결혼이, 덕임에게는 오히려 자기 자신과 일상적 행복을 박탈하는 비극적 사건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상대적 약자인 궁녀의 욕망에 주목하고, 결혼이 개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고찰해볼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가능했고 시청자의 공감을 끌어냈다.
결혼과 행복의 공고한 결합 연결고리는 삐걱거리다 점점 희미해지는 중이다. 2020년 ‘비혼 출산’을 한 사유리 씨가 KBS 육아 예능<슈퍼맨이 돌아왔다>에 출연하자 일부 보수단체가 반발했다. 사유리의 출연을 반대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을 올리고 방송국 앞에서 규탄 시위까지 벌였다. 그러나 KBS는 “시대가 변하면서 다양한 가족의 형태가 생기고 있고, 사유리 가족 역시 그중 하나”라고 일축했다.
(출처=사유리 인스타그램)
사유리는 결혼-출산-양육이 한 세트라는 공고한 믿음을 깨고, 원하지 않는 사람과 억지로 결혼하기보다는 스스로 ‘원하는 삶’을 취사선택했다. 비혼 에세이 『아니 요즘 세상에 누가』를 펴낸 작가 곽민지는 본격 비혼 라이프 가시화 방송 팟캐스트 ‘비혼세’를 진행한다. 결혼하지 않았을 뿐 다양하게 세상을 사랑하고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내용으로 가득한 이 책에 김이나 작사가는 이런 추천사를 썼다. “이 책은 비혼이라는 탈을 쓴, 내가 나를 책임지고 사는 삶에 대한 이야기이며 고온의 사랑을 다루는 법에 대한 안내서이다.”
(좌) 도서<아니 요즘 세상에 누가> (출처=위즈덤하우스), (우)작가 곽민지 (출처=곽민지 작가 홈페이지)
결혼만이 유일한 사랑이자 행복의 매듭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 자주 잊는다. 조금만 고개를 돌려보면 표본을 쉽게 구할 수 있는데 말이다. 행복은 결혼 같은 선택 하나로 쉽게 방향을 틀고 그 안에 머무르는, 하나의 단순한 통합체가 아니다. 결혼이 행복을 약속하지 않듯, 비혼이 불행을 약속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결혼이 불행을 의미하지도, 비혼이 자유만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이분법적인 평가를 넘어서서, 엔딩 없는 삶에서 매 순간 나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 나의 행복은 어떤 빛깔이고, 언제 찾아오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