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주류에서 주류가 된 여성 캐릭터 (장혜선 월간객석 기자) 첨부이미지 : 그림2.png

먼저 언급하고 싶은 프로그램이 있다. 지난해 필자가 재밌게 봤던 프로그램은 ‘스트릿 우먼 파이터’(Mnet)이다. 여성 댄서들이 오직 실력으로만 승부를 가리는 모습이 꽤 감격이었다. ‘언니들의 싸움’을 지켜보며 여성 중심 콘텐츠가 어느덧 대중문화 중심에 있다는 걸 체감했다. 방송에 출연한 가수 제시가 댄서들을 보면서 “대한민국 여자들 춤 잘 춰”라고 언급하자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이전까지는 단 한 번도 여성 댄서가 중심이 된 무대를 본 적이 없다.

ⓒMnet

공연계에도 여성이 주연으로 서는 작품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러면서 알게 된 건 ‘대한민국 여성 배우들 연기 진짜 잘 한다’는 것. 긴 역사 동안 여성 배우들은 역량이 충분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채로운 배역을 맡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처음에는 여성이 주인공으로 서면 무조건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그러다 이제는 이러한 생각이 든다. 진짜로 봐야 하는 건 무엇이지?

여성국극 <시집 안 가요> 사진, 1956년 ⓒ배급사 영희야 놀자

 

한국전쟁으로 어지러웠던 1950년대부터 짚어보자. 그야말로 폐허였던 그 시절, 공연은 많은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어주었다. 그 중심에는 ‘여성국극’이 있었다. ‘국극’은 쉽게 말하자면 ‘창극’, 더 쉽게 말하자면 ‘국악 뮤지컬’이다. 여성국극의 인기는 실로 대단했다. 소위 말하는 ‘사생팬’의 원조는 여성국극에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남장배우를 향한 애정 공세가 뜨거웠다. 당시 여성 팬들은 배우들을 만나기 위해 가출도 했고, 패물도 갖다 바쳤으며, 일부는 극단에서 배우들의 뒷바라지를 했다고 한다. 1960년대 방송 매체가 등장하며 여성국극의 인기는 점차 쇠퇴하고야 말았고, 남성 소리꾼을 비롯한 남성 중심의 제도권 문화인들의 비판 대상이 됐다. 여성국극은 사실상 남성/여성 역할을 구분하기 위해 의상부터 화법까지 전형적인 성별 이분법을 적용했다. 그러므로 여성국극은 분명히 한계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진정한 페미니즘 연극은 언제부터 시작했을까? 연극배우 박정자, 손숙, 윤석화는 1985년 문을 연 소극장 산울림의 ‘여성연극’을 이끌었다. 산울림이 한국연극사에 남긴 굵직한 공적은 1980~1990년대에 페미니즘 연극을 유행시켰다는 점이다.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 <딸에게 보내는 편지>, <자화상> 포스터 (제공=신울림)

 

임영웅이 연출한 ‘위기의 여자’를 시작으로,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 ‘담배피는 여자’, ‘딸에게 보내는 편지’ 등을 통해 여성을 내세운 작품을 주로 선보였다. 소극장 산울림 개관 후 1990년까지 60회 정기 공연 중 여성연극이 26회에 이를 정도다. 특히 윤석화는 ‘여성 1인극’ 흥행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장 콕토의 1인극 ‘목소리’(1989)에 출연해 주목을 받았는데, 이 작품은 전화기 하나에만 의존한 채 여배우 한 명이 오롯이 무대를 감당하는 형식이었다. 어느덧 데뷔 50주년을 앞둔 윤석화는 지난 시절 산울림에 올렸던 세 작품(‘하나를 위한 이중주’, ‘목소리’, ‘딸에게 보내는 편지’)을 엮어 한 달간 윤석화 아카이브 ‘자화상I’(2021.10.20.~11.21/소극장 산울림)을 선보였다.
 
1986년에 산울림 소극장이 ‘위기의 여자’로 페미니즘 연극의 물꼬를 튼 지 어연 35년이 흘렀다. 그동안 페미니즘을 표방하는 작품은 잔잔하게 있었지만, 마침내 2015년, 공연계에 페미니즘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남성 중심 서사에 본격적으로 반기를 드는, 부당함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을 다루는 작품이 줄지어 발표됐다. 그 배경으로는 공연계 ‘미투 운동’이 있다.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 이윤택이 단원들을 상습 성추행한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았고,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미투’를 응원하는 집회가 열리기도 했다. 이런 운동에 힘입어 여성 혐오에 맞서는 문제의식을 담은 작품이 대거 공연된 것이다.

 

뮤지컬 <레드북> 포스터 ⓒ아떼오드

 

대표작으로는 뮤지컬 ‘레드북’을 꼽을 수 있다. 2016 창작산실 올해의 뮤지컬에 선정된 ‘레드북’은 2017년 트라이아웃, 2018년 초연으로 선보였다. 수정을 거쳐 2021년 3년 만에 재연을 올렸는데 코로나 확산 여파에도 관객의 발걸음이 꾸준히 이어졌다. 신사의 나라 영국, 그중에서도 여성을 남성의 소유물로 여기던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숙녀보단 그저 ‘나’로 살고 싶은 여자 안나가 주인공이다. 여성이 글을 쓸 수 없던 시절, 안나는 ‘레드북’이란 잡지에 성(性)에 대한 진솔한 글을 써 파장을 일으킨다. 사회적 비난 속에 구속되지만 안나는 자신의 글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문제투성이 세상에 오답으로 남겠다”며 편견에 맞서 싸운다. 대본을 쓴 한정석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3년 전에 대본을 쓸 때만 해도 왜 페미니즘 시각이 담긴 작품을 쓰냐는 주변의 시선이 많았는데 지금은 시기적절하다는 이야기를 들으니까 어리둥절하다”며 “미투 운동이 일으키는 변화가 ‘레드북’을 곧 낡은 이야기로 바꿀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고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페미니즘 공연을 모색하는 창작 주체가 늘고, 페미니즘 공연을 찾아가는 관객층도 넓어졌다. 남성의 보조 역할에 머물던 여성 배역이 점점 주체적으로 변화를 꾀했다. 일례로 희곡에서 개연성 없는 성폭력 장면이 나오면 이전에는 무감각했던 것들이 이제는 문제적으로 다가온다. ‘페미니즘 연극제’를 연 페미시어터 나희경 대표는 “관객의 요구가 달라졌기 때문에 연출도 배우도 이 주제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는 말을 밝혔다. 실제로 라이선스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 창작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 등은 여성을 그리는 측면에서 관객이 불편할 수 있는 장면에 수정을 들어가기도 했다.

2018년 재공연한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의 한 장면 ⓒ세종문화회관

 

이제는 페미니즘이 공연계 흐름 중 하나인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페미니즘이란 이름을 걸고 공연을 올리는 것이 점차 당연해질수록, 여성의 문제를 설득력 있게 다루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지난해 무대에 오른 세 작품을 중심으로 ‘여성이 주인공인’ 공연을 재고해 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베르나르다 알바 포스터 ⓒ우란문화재단

 

먼저,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2021.1.22.~3.14/정동극장)는 캐스팅 자체만으로 주목을 받았다. 100분을 책임지는 무대 위 배우 10인은 전부 여성이다. 2018년 초연 당시 국내에 잘 알려진 작품이 아니었음에도 3주간의 티켓이 전석 매진된 이유는 여성으로만 이뤄진 이례적인 캐스팅 때문이었다. 새로운 여성 서사를 기다려온 관객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작품은 막이 올랐다. 작품은 1930년대 안달루시아 지방의 한 농가가 배경이다. 남편이 죽고 집안의 권력자로 군림하게 된 베르나르다 알바는 8년 상을 치르는 동안 다섯 딸에게 절제된 삶을 강요한다. 자유를 욕망하는 딸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저항하고, 결국 균열이 시작된다. 많은 주목을 받았지만, 극단적으로 호불호가 갈렸다. 여성들의 무대 기회를 제공했다는 것만으로도 옹호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극의 메시지는 오히려 ‘반-페미니즘’ 적이었다며 우려를 표하는 이들도 있었다. 집안에서 통제된 여성들이 각자 남성을 통한 자유를 갈망하다 파멸에 이른다는 내용은 비판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김성녀가 파우스트 역할을 맡았던 국립극단의 <파우스트 엔딩> 사진 ⓒ국립극단

 

국립극단의 ‘파우스트 엔딩’(2021.2.26.~3.28/명동예술극장)은 젠더프리(gender-free) 캐스팅으로 주목받았다. 젠더프리 캐스팅은 배우 성별에 관계없이 배역을 정하는 것을 말한다. 괴테의 역작 ‘파우스트’는 그간 여러 예술가들에 의해 재창작됐다. 국립극단이 선보인 ‘파우스트 엔딩’은 파우스트 역을 배우 김성녀가 맡아 화제를 모았다. 연출을 맡은 조광화는 “‘여성 파우스트’를 통해 인간에 대한 공감을 더욱 세밀하게 풀어낼 수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파우스트가 그레첸이라는 어린 여성에게 품은 감정을 남녀 간 사랑을 넘어 인간 사이 교감과 연민으로 더욱 넓힐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연극 <비평가> 포스터 ⓒ극단 신작로

 

2018년 막을 올린 연극 ‘비평가’도 젠더프리 캐스팅을 시도해 이슈가 된 바 있다. 스페인 작가 후안 마요르가의 희곡으로 극작가와 비평가의 첨예한 논쟁을 그린 2인극이다. 2017년 초연 당시에는 희곡 그대로 남성 배우들이 주인공을 연기했다. 재연에서는 여성 배우 백현주와 김신록이 남성 역할을 맡아 무대에 섰다. 이영석 연출가는 ‘비평가’에 여성 배우를 투입한 이유를 두고 “여성 배우들이 지적인 논쟁을 벌이는 캐릭터를 연기할 기회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는 게 연극계의 현실”이라면서 “배우의 성별이라도 바꾸어 준다면 왜곡된 현실을 조금 더 상대화시켜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비평가’나 ‘파우스트 엔딩’을 보면 여성 배우들의 역량이 훌륭하다는 생각이 든다. 여성 배우들이 가진 어마어마한 잠재력을 보여줬다는 것만으로도 국내 젠더프리 캐스팅은 의미가 있다.

연극 <줄리엣과 줄리엣> 사진 ⓒ창작집단 LAS

 

이제는 더 나아가 젠더가 바뀌며 극의 해석이 어떻게 달라질지에 대한, 창작진의 심도 있는 고민이 필요한 때가 된 것 같다. 최근, 창작집단 LAS의 연극 ‘줄리엣과 줄리엣’(2021.10.21.~11.21/브릭스 씨어터)이 다시금 무대에 올랐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재해석한 작품으로, 2018년 초연과 2019년 재연 당시 매진 행렬을 이어갔다. 집안의 반대에 부딪혀 이루지 못한 사랑 이야기는 원작과 동일하지만, 각기 다른 집안의 줄리엣과 줄리엣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점이 특징이다. 이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문학성을 유지하면서도, 퀴어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깊이 있게 다뤘다. 두 줄리엣의 장애물은 성소수자를 향한 혐오이다. 또 한 명의 성소수자도 등장하는데, 무성애자 하녀 네릿서이다. 원작의 로렌스 신부는 승려로 변용되어 출연한다. 승려 역에는 여성 소리꾼 정지혜를 캐스팅했다. 16세기 기독교가 주류를 이루었던 유럽을 배경으로 하면서, 비주류의 불교, 심지어 여성 승려를 출연시켰다는 점은 의미가 깊다. 소수자가 소수자를, 비주류가 비주류를 포용하는 모습에서 창작진의 의도가 명확히 드러났다.
 
앞으로 배우 성별에 무관한 캐스팅이 계속 이어질 것으로 예상한다. 하지만 특정한 요소를 갖췄다고 마냥 좋다고 하기에는 뭔가 애매하다. 여성이 주인공인 작품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여성 서사’가 무엇인지 더욱 치열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장혜선

월간객석 수석기자, 바른 시선으로 무대를 영원히 기록하는 사람이 되고자 부단히 글을 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