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의 뮤지컬 캐스팅 원년은 2005년 뮤지컬 ‘아이다’의 초연에 핑클의 메인 보컬이었던 옥주현이 주연을 맡았을 때라고 볼 수 있다. 바로 그 뒤를 이어 SES의 메인 보컬이었던 바다도 ‘노틀담 드 파리’의 주연 에스메랄다 역으로 무대에 섰지만 당장 아이돌의 뮤지컬 진출이 본격화되지는 않았다. 옥주현과 바다는 유명 아이돌 출신이라는 강점 덕분에 연기 경험 없이 바로 주연으로 등극했지만, 무대 경력 초반에는 연기력 부족에 대한 비판을 감내해야 했다.
(좌)노트르담 드 파리에 출연한 바다, (우) 아이다에 출연한 옥주현 (출처=플레이DB, 신시컴퍼니)
아이돌의 뮤지컬 출연에 기폭제가 된 것은 옥주현이나 바다보다는 동방신기의 구성원이었던 김준수라고 할 수 있다. 뮤지컬 ‘모짜르트’에 출연한 그는 티켓 오픈을 하자마자 약 삼천 석짜리 세종문화회관의 좌석을 매진되게 하면서 뮤지컬계에 아이돌 티켓 파워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동방신기에서 탈퇴해 매체에서 사라진 그를 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기에 티켓팅은 그야말로 피켓팅이 되었고, 출연 회차마다 매진되게 하는 김준수의 티켓 파워 앞에서는 연기력 논란도 의미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뮤지컬 무대를 그의 팬이 아닌 일반 관객이 볼 기회가 거의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무대는 전설 속의 무언가처럼 기존의 뮤지컬 팬들로서는 알 길이 없는 그들만의 세계로 남았다. 이후 뮤지컬계의 아이돌 캐스팅은 제 2의 김준수 찾기에서 시작하여, 2021년을 지나면서는 프러덕션의 최소한의 안전장치인 듯 당연하게 자리 잡았다. 이제 아이돌의 뮤지컬 캐스팅은 더 이상 새로운 일이 아니다.
뮤지컬 모차르트 10주년 공연에 출연한 김준수 (출처=이데일리)
뮤지컬이 시작된 뉴욕의 브로드웨이에서도 초창기 공연에는 내용은 없고 다양한 엔터테이너들의 장기자랑 위주로 꾸며지곤 했는데, 그중에서도 디바는 단연 유럽 출신의 유명 배우와 가수였다. 애당초 뮤지컬 자체가 무대 장르로 돈을 벌어보고자 하여 시작된 만큼 현재의 브로드웨이도 티켓파워만 있다면 아이돌이든 영화배우든 본인의 의지만 있다면 제작자들은 캐스팅 하기를 원한다. 캐서린 제타 존스는 곡이 어렵기로 소문난 스티븐 손드하임의 뮤지컬 ‘A Little Night Music’의 주연으로 출연하여 가창력을 의심 받았고, 줄리아 로버츠는 연극 ‘Three Days of Rain’에 출연하여 소박한 연기라는 평과 더불어 발성이 부족하다는 평을 들었고 그 해 토니상 시상식에 후보가 아니라 시상자로 등장해 후보에 오른 동료 배우들을 칭송하는 발언으로 공감을 샀다. 그 외에도 알 파치노, 대니얼 크레이그 등이 연극 무대에 올랐으며 현재는 영화 ‘엑스맨’의 울버린으로 잘 알려진 휴 잭맨이 뮤지컬 ‘뮤직맨’의 주연으로 오랜만에 브로드웨이 뮤지컬 무대로 돌아왔다.
헐리우드의 짱짱한 유명 배우들은 무대에 출연하지만 의외로 아이돌 출신의 배우들은 찾아보기 어렵다. 몇 가지 이유를 꼽자면 첫 번째는 아이돌의 높은 출연료를 들 수 있다. 유명 배우들은 브로드웨이 무대에 맞는 출연료를 받는 데 합의한다. 하지만 팀으로 활동하는 아이돌은 공연을 위해 짧지 않은 연습 기간과 공연 기간을 빼면서까지 합의하기에는 무대 출연료가 턱없이 작다. 브로드웨이에는 배우 노조가 존재해서 출연배우와 스텝들의 최저임금이 법으로 정해져 있다. 때문에 아무리 인기 있는 배우라 할지라도 한 회당 벌어들일 수 있는 전체 객석 수에 근거한 수입 총액 안에서 출연료가 책정된다. 전체 제작비가 가장 아래부터 차곡차곡 쌓여서 가장 많이 줄 수 있는 액수가 산정되는 방식이다. 인기 있는 배우의 출연료를 먼저 정할 수가 없다. 때문에 인기 있는 배우라도 무턱대고 출연료를 많이 줄 수가 없다.
두 번째는 브로드웨이의 핵심 관객층이 아이돌을 간절히 바라는 나이대가 아니라는 점을 들 수 있다. 브로드웨이의 관객층은 40대 이상의 중년 여성이 주를 이루는데, 지금 한창 인기 있는 아이돌은 이들 관객층을 극장으로 끌어들일 만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이러한 측면에도 불구하고 ‘아이돌’이라는 타이틀로 브로드웨이 무대에 서는 아이돌들이 있다. 이들은 주로 오디션 프로그램 출신의 배우들로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가장 대표적인 배우로는 ‘아메리칸 아이돌’로 스타가 된 제니퍼 허드슨을 들 수 있다. 뮤지컬 영화 ‘드림걸즈'에도 주인공 에피 역으로 출연했던 제니퍼 허드슨은 뮤지컬 ’컬러 퍼플‘로 무대 뮤지컬에 진출했다.
영화<드림걸즈>에 출연한 제니퍼 허드슨 (출처=네이버영화)
하지만 제니퍼 허드슨이 아메리칸 아이돌이라는 오디션 프로그램 출신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아이돌과는 거리가 있다. 위에 언급한 이유로 브로드웨이는 아직까지는 ’현직‘ 아이돌과는 거리가 있다.
반면 한국에서는 아이돌이 캐스팅 되지 않은 뮤지컬 찾기가 더 어려울 정도다. 현재 공연중인 대극장 뮤지컬에는 아이돌들이 빼곡하게 포진해 있다. 그 이유를 단순하게 브로드웨이와의 반대 요인을 대입할 수는 없다. 아이돌들의 출연료가 다른 뮤지컬 배우들보다 저렴한 것도 아니고 스테디셀러 뮤지컬 가운데는 중년 관객들이 견인하는 작품들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아이돌 캐스팅이 성행할 수 있는 이유는 한국만의 독특한 캐스팅 문화인 더블 캐스팅 덕분이다.
뮤지컬 <지킬앤하이드>로 잘 알려진 배우 류정한, 조승우 (출처=오디컴퍼니)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에서 조승우와 류정한이 같은 배역을 나눠 맡은 이후, 한국에서의 더블 캐스팅은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여 이제는 한 배역에 다섯 명까지 투입되기도 한다. 브로드웨이에서 배역을 맡을 때는 연출가가 특별한 의도를 지니지 않는 이상 한 배역 당 한 배우가 연기하는 게 일반적이다. 가끔 연극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다 역을 연기하기도 하고 두 명의 배우가 서로의 배역을 바꿔가며 연기하는 경우도 있지만 한 배역을 여럿이 나눠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한국은 다르다. 한 배역에 여러 명이 투입되고 회차마다 배우들의 조합이 다양하게 변한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배우에 따른 다양한 연기의 스펙트럼을 즐길 수 있고 연출가 입장에서도 배우에 따른 다른 해석을 시도해 볼 수도 있다. 단점으로는 연습량이 늘어나고 캐스팅 비용에 따라 티켓 가격이 상승할 수 있다. 한 배역당 투입되는 배우가 많을수록 뮤지컬 팬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좋아하는 배우들의 조합이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안타까운 단점도 존재한다.
뮤지컬은 티켓을 팔아 흑자를 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무대장르다. 뮤지컬의 발달 단계부터 그러했기 때문에 제작자들이 무대 인지도와 상관없이 티켓파워를 지닌 아이돌을 캐스팅하여 제작비를 보전하려는 시도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행보다. 게다가 한국의 관객층은 유럽이나 미국에 비해 매우 젊어서 관객층의 요구에도 맞을 뿐만 아니라 어려서부터 춤과 노래를 혹독하게 훈련받아온 ’아이돌‘이라는 직업의 특성이 뮤지컬이라는 장르와도 잘 맞을 수밖에 없다. 그럼 아이돌은 뮤지컬 무대에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 뮤지컬 무대에서 그들은 연기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면서 아이돌로서 자신의 가치를 올릴 수도 있다. 때로는 그들이 무대 위에서 연기를 연습하는 걸 보는 데 왜 내 돈을 지불해야 하냐며 불만을 표시하는 뮤지컬 팬들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불만은 더블 캐스팅이라는 전무후무한 한국만의 캐스팅 시스템 덕분에 이제는 어느 정도 해결이 된 상태다. 아이돌팬과 뮤지컬팬이 나름 사이좋게 회차를 나눠 가지며 서로의 영역을 슬쩍 엿보는 정도로 정리되는 양상이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정신 차리지 않으면 남의 오빠를 보게 되는 뮤지컬’이란 제목으로 화제가 됐던 뮤지컬 <메피스토>의 캐스팅 (출처=인터파크티켓)
그저 주의할 것은 내가 예매한 회차가 내 최애가 등장하는 회차가 맞는지 더블 체크를 하는 것! 그것만 잊지 않는다면, ’내 최애 보러 갔다가 남의 최애를 보게 되는‘ 사례는 면할 수 있지 않을까? K-뮤지컬은 상업성이라는 측면에서 일찌감치 K-Pop과 공존해 왔고 그 교류는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수진(극작가, 공연평론가)
극작가 겸 공연평론가 이수진은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를 본 이후 뮤지컬에 대한 호기심과 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를 동시에 획득했다. 이후 한국 뮤지컬계의 고전으로 꼽히는 책 ‘뮤지컬 스토리’를 썼고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와 ‘그리스’를 번역했다. ‘콩칠팔새삼륙’,‘신과 함께 가라’ 등의 뮤지컬을 쓰며 여전히 무대 언저리를 헤매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