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도생 사회 속 숨은 ‘빌런’ 찾기(정시우 영화평론가) 첨부이미지 : 7.png

 

*본 게시물은 ‘K-영화와 문화다양성’을 주제로 외부 전문가가 개인적 견해를 바탕으로 작성한 칼럼입니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 2000년대 초, MBC 드라마 <다모>에 등장해 뭇 시청자의 마음에 훈풍을 돌게 했던 명대사다. 그러나 이 대사는 언제부터인가 다른 방식으로 패러디돼 정반대 방향으로 떨궈지기 시작했다. “너만 아프냐? 나는 더 아프다”가 그것이다. 전자가 타인에 대한 공감을 전제로 한다면, 후자는 그런 공감조차 끼어들기 힘든 빡빡한 현실을 진하게 드러낸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에서 타자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은 갈수록 옅어지고 있다. 사회적 약자를 옥죄는 구조적 모순이 곪을 대로 곪아,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끼리도 경쟁해야 하는 각자도생의 시대가 되어서다.
 
다양한 상황, 다양한 관계 속에서 서로가 서로의 적이 되는 현실. 지금 한국 사회를 옥죄는 이 새로운 갈등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먹고 사는 문제를 둘러싼 논쟁은 과거에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땐 ‘갑(甲)과 을(乙)’의 구분이 명확했고, 을들이 뭉쳐서 서로를 위로하고 연대했었다. 그러나 생존을 위한 무한 경쟁 사회가 열리면서 피억압자와 억압자의 구별이 흐려져 버렸다.

 영화는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과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은 ‘각자도생 코리아’의 현실을 집요하게 그려내며 세계적인 인기를 끈 바 있다. 사회 현실을 발 빠르게 실어 날라 온 다양성 영화들이 부쩍 주목하고 있는 것 역시 바로 이것, ‘을끼리의 싸움’이다. 이런 흐름은 지난해 평단으로부터 고른 지지를 얻은 <드림팰리스>와 <다음 소희>에서도 찾을 수 있다.

가성문 감독의 영화 <드림팰리스>는 산업재해로 남편을 잃은 혜정(김선영)이 아파트로 이사 오면서 시작된다. 혜정은 잘 살고 싶다. 남편의 산재 보상금으로 산 아파트이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동료 유족들에게 배신자라는 소리를 들어가며 ‘남편 목숨값’으로 받은 합의금으로 마련한 보금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희망은 요원하다. 입주 첫날 그녀를 맞이한 게, 아파트 하자보수로 인한 녹물이라니! 때마침 아파트 미분양으로 인해 할인 분양 사태가 벌어지고, 앉아서 자산가치를 강탈당할 처지에 놓인 기존 입주민들과 할인 분양 받은 신규 입주민 간 분란에 혜정은 휘말린다.
 

영화<드림팰리스>스틸 ⓒ인디스토리


산재보상을 둘러싼 갈등을 피해 아파트로 이사 온 혜정이 또 다른 ‘을들의 싸움’으로 떨어지는 과정을 지켜보는 데에는 깊은 한숨과 안타까움이 동반된다. 사건을 야기한 진짜 빌런은 정작 꼬빼기도 보이지 않고, 부조리로 설계된 미로 속에서 피해자들만이 남아 서로를 원망하고 공격하는 아이러니. 을과 을의 싸움으로 인해 이득 얻는 자는 과연 누구일까.

 

영화<드림팰리스>스틸 ⓒ인디스토리

 

그런가 하면 정주리 감독의 <다음 소희>는 을과 을의 싸움에서 더 나아가 ‘을과 병과 정’으로 이어지는 약육강식의 노동 현장을 파헤친다. 피라미드 형태의 먹이 사슬에서 착취는 하위 단계로 갈수록 극악해지기 마련. <다음 소희>의 주인공인 특성화고 실습생 소희(김시은)는 이런 경쟁 톱니바퀴 가장 밑바닥에 놓인 존재다. 영화는 콜센터 해지방어부서에서 일하며 인간으로서의 인권을 묵살당해 온 소희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과정을 담은 전반부와 오형사(배두나)가 소희에게 일어난 비극을 추적하는 후반부로 나뉘어 진행된다.

 

영화 <다음 소희> 스틸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오형사가 수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가장 많이 마주하는 상황은 책임 전가다. 업체는 학교에, 학교는 교육청에, 교육청은 노동부에, 노동부는 다시 업체에 책임을 미루는 무한 루프의 떠넘기기. 이들에게도 각자가 주장하는 사정이라는 게 있다. 학교는 ‘취업률’이 높아야 지방 교육청으로부터 예산을 받을 수 있고, 지방 교육청은 관할 학교의 ‘취업 실적’이 좋아야 교육부로부터 인센티브를 받을 수 있으며, 하청 업체는 실적이 좋아야 원청으로부터 일감을 받을 수 있다. 학생은 학교의 을이 되고, 학교는 하청 회사와 교육부의 을이 되고, 하청은 또 원청의 을이 되는 공고해진 중간 착취의 지옥도 속에서 오형사의 진실 찾기는 줄곧 허망해진다.

 

영화 <다음 소희> 스틸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이처럼 <드림 팰리스>와 <다음 소희>는 ‘악덕 자본가(갑) vs 노조(을)’라는 고전적 의미의 대결 구도보다 한층 복잡한 세상의 질서를 드러낸다. 나의 이익이 타인의 이익과 배치되는 비정한 현실 속에서 우린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가. 영화는 우리가 맞딱뜨린 현실에 질문을 던진다. 문화다양성이라는 것이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왜곡된 세상의 렌즈를 바로잡는 일이라고 했을 때, 이들 영화들은 혐오를 조장하고 약자끼리 싸우게 만드는 새로운 시대 괴물(신자유주의 시스템)의 존재를 정확하게 인지하도록 환기시킨다. 을과 을이 엉겨붙도록 부추기는 시스템을 인식하고 다양성의 관점에서 재해석할 때 변화는 일어난다고 말하는 이들 영화의 목소리에 지지를 보낸다.

 


정시우
매체 소속 영화 기자를 거쳐 프리랜서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이다. 매거진 [지큐GQ], [엘르ELLE], [시사저널] 등에 칼럼과 인터뷰를 기고하고 있으며 MBC 라디오, 네이버 플랫폼을 통해 배우와 영화에 관해 이야기해왔다. 배우 10인을 심층 인터뷰한 인터뷰한 <배우의 방>을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