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게시물은 '웹툰과 다양성’을 주제로 외부 필자가 개인적 견해를 바탕으로 작성한 에세이입니다.
어느 날 친구가 대뜸 만화가가 되겠다고 했다. 나는 걔가 그림을 그리는 걸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만화를 그린다는 게 그렇게 대뜸 선언한다고 할 수 있다는 게 아니라고 말했지만, 친구는 그날부터 이면지를 잔뜩 쌓아놓고 선을 북북 긋기 시작했다. 직선을 똑바로 그리는 것부터가 시작이라나. 나는 그 애의 손가락을 따라 생겨나는 선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몇 주 뒤 다시 그의 월세방에 놀러갔을 때는 선으로 가득한 이면지가 방 한 켠에 가지런히 쌓여있었다. 직선이었던 선은 구불구불 해지기도 하고, 동그래지기도 하더니 어느 순간 구가 되었다. 거기 점 몇 개를 찍으니 얼굴이 되었다. 하루에 딱 한 장씩만 채운다고 했는데, 나는 그 말이 진심인 줄 모르고 또 웃어버렸다. 그런데 시간은 깜지가 된 그의 이면지와 함께 차곡차곡 쌓여갔고, 몇 달 후 그는 진짜로 웹툰 작가로 데뷔해 버렸다. SNS에 올렸던 만화 몇 개가 화제가 되면서 한 웹진 플랫폼으로부터 정식 청탁제안을 받은 것이다. 그는 자기와 똑같이 생긴 캐릭터가 등장하는 만화를 그렸다. 일단 그릴 수 있는 게 자기밖에 없어서였다.
그는 그렇게 만화가가 되었고, 나도 웹툰을 알게 되었다. 언젠가부터 그의 월세방을 드나드는 빈도만큼 그의 웹툰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학교를 걸어가고 있는데 아는 애가 다가와서 말했다. "만화에서 잘 봤다" 고. 진상을 확인하고자 그 만화가 있다는 링크로 들어갔고 거기에는 나를 아는 사람이라면 나라는 걸 단박에 알 수 있는 캐릭터가 나왔다. 언젠가 내가 좋아하는 애한테 차이고 그 집에 가서 하소연을 했던 일이 그대로 만화가 되어 있었다. 전혀 들은 바가 없었던 나는 이 일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만큼 인상적인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영광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수치로 받아들여야 할지 헷갈렸다. 그 만화는 나름 웃기고 적당히 슬픈, 봐줄만한 이야기였다. 거기 등장한 게 나라는 것만 빼면.
그 뒤로 만화는 항상 누군가와 함께 내 삶에 등장했다. 한때 내가 좋아하던 애는 기억하는 거의 모든 순간 <이말년 씨리즈>를 보고있었다. 앞에 사람이 있건 없건 핸드폰을 들고 늘 쿡쿡거렸고 그 시선을 따라가보면 언제나 이말년 시리즈가 있었다.
이말년씨리즈 ⓒ중앙북스
그 만화를 처음 봤을 때 생각은 "무슨 이런 걸 그리는 사람이 다 있어"였으나 그런 걸 그토록 즐겨 보는 사람을 좋아하게 된 나도 할 말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와 문자를 주고받거나 단순한 대화를 할 때 시도 때도 없이 이말년 씨리즈에서 나온 대사가 등장했으므로 나도 그 만화를 숙지할 수 밖에 없었지만, 그 진가를 알아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아름답고 우아한 것은 다른 데 가서 일 보라는 듯한 그림체, 당장이라도 꼬불거리며 화면 밖을 떠날 것 같은 신들린 선, 다음으로 어떤 대사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전개까지. 한순간에 모든 걸 부수고 웃으며 다시 세워버리는 밑도 끝도 없는 위대함이 있는 만화였다. 한 번 알게 된 그 맛은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었다. 사실 그 만화가 더욱 사무치게 다가오는 것은 시간이 꽤 지나 내가 30대에 가까워진 요즘이다. 완결된 지가 한참 지났는데도 여전히 그 감칠맛이 여전한데, 모든 인물이 거나하게 취한 것처럼 반쯤 미쳐서는 춤추듯 아무렇게나 흘러가는 전개가 그 어느 때보다도 시원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토록 보통의>는 내 유부녀 친구가 추천한 로맨스 웹툰이다. 어느 날 대뜸 삶이 지루하다는 나에게 친구가 이 웹툰의 링크를 보내온 것이다. 자신에게 ‘사막의 단비’ 같은 만화라고 말하면서. 마침 출근길 지하철에서 그 링크를 열게 된 나는 지하철의 여느 직장인들처럼 '출근을 함께할 웹툰'을 갖게 되었다. 한 컷 한 컷이 정성스럽게 그린 감성 일러스트처럼 아름다웠던 이 작품은 다양한 시각의 사랑 이야기를 짧으면서도 깊고 짜임새 있게 다룬다.
웹툰<이토록 보통의> (제공=카카오 웹툰 ⓒ캐롯)
작가가 100번의 생을 살아서 100번의 다른 연애를 했다고 밖에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한 편 한 편이 너무도 현실적인 전개와 섬세한 감정선, 사랑에 대한 깊은 통찰로 이루어져 있어 가슴을 찌르르 울렸다. 출근길에 이 만화를 보다가 출근에 대한 서러움과 주인공의 감정선에 북받쳐 눈물을 글썽인 채로 회사에 도착한 것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캐롯이라는 필명 외에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던 이 작가의 성별과 나이를 멋대로 추측하며 읽는 재미가 있었다. 직접 겪어보지 않고서는 절대 이렇게 쓸 수 없다고 믿을 정도로 생생한 감정을 담아냈기에, 60대의 남자가 아닐까 하고 추측했던 내 예상은 모두 빗나갔다. 캐롯은 아주 젊은 여자 작가였고, 나는 그 사실에 내가 흘린 모든 눈물과 깨끗한 감탄을 보내게 되었다.
누군가와의 첫 만남처럼 내게 우연하게 다가온 웹툰 작품들. 나는 이 땅의 웹툰이 그토록 다양하고 찬란한 세계를 구축하고 있음에 놀라워하며, 그렇게 천천히 웹툰의 세계에 젖어 들었다.
양다솔
10년동안 쓴 글들을 모아 독립출판물을 발간하며 작가로 활동을 시작했다. 수필집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 <아무튼, 친구>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