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치킨이 유행하는 시대 (서은영 만화 평론가) 첨부이미지 : 그림14.png

*본 게시물은 ‘웹툰/웹소설과 문화다양성’을 주제로 외부 전문가가 개인적 견해를 바탕으로 작성한 칼럼입니다.

 

최근 웹툰, 웹소설이 대세다. 웹툰의 인기야 이미 고착되었다고 느낄 정도이고, 몇 해 전부터는 웹소설이 부상하면서 이제 두 매체는 플랫폼의 주요 원료(콘텐츠)가 되었다. 게다가 웹소설을 원작으로 한 웹툰인 노블코믹스가 글로벌 시장을 견인하면서 웹툰과 웹소설은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는 중이다.
웹툰과 웹소설이 인기를 끄는 이유 중 하나는 이들 매체가 유저(독자)의 욕망을 즉자적으로 투영한 콘텐츠이기 때문이다. 이 점이 가장 매력적이다. 정통소설에서처럼 짐짓 고상한 체하거나 점잖음을 가장하지 않는다. 웹툰과 웹소설은 다소 노골적인 욕망도 통쾌함을 앞세운 ‘사이다 서사’로 과장해 빠른 전개를 보여준다. 생존경쟁 시대에 살아남아 최강자가 되고 싶다는 유저의 욕망은 게임 판타지물에서 먼치킨이라는 독특한 유형의 인물을 등장시켰다. 로맨스 판타지에서는 귀족 계급의 딸로 태어나 모든 이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다는 욕망을 영애물에 투영한다.

#기업물), 고귀한 혈통의 왕자와 사랑에 빠지고 싶다(#로맨스판타지), 절륜남과 사랑에 빠져 성적욕망을 충족하고 싶다(#절륜물), 일처다부를 실현하고 싶다(#역하렘물) 등 현실에서는 불가능하거나, 금기시되는 욕망을 서슴없이 드러내는 콘텐츠이기도 하다. 또한 플랫폼의 AI 전략에 의해 자신의 취향과 유사한 작품이 매칭되는 마케팅 전략은 유저의 취향을 더욱 강화시켜 나가게끔 작동한다. 웹소설과 웹툰에 한번 빠지면 헤어나기 힘든 이유는 바로 이러한 매커니즘에 있다.

 

 

<재벌집 막내아들>, <언니, 이번생엔 내가 왕비야>ⓒ네이버시리즈, <하렘의 남자들> ⓒ해피북스투유

 

매커니즘이라고는 해도 역시 먼치킨류의 주인공이 자주 목격되는 것은 그만큼 유저(독자)들의 선택을 받았기 때문이겠다. 유저들은 먼치킨 주인공이 등장하는 양산형 판타지가 지겹다고는 하나, 역시 양산형 판타지가 주는 만족감이 있다고 말한다. 이 양가적 감정 사이에서의 배회는 댓글에서 심심찮게 목격되는 바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치킨은 여전히 이 업계의 최강자다. 일찌감치 양산형 판타지의 위기론이 대두했어도 여전히 인기를 끌며 웹툰과 웹소설의 한 축을 구축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유저들은 왜, 먼치킨을 소환했으며, 동기화하는 것일까.

*먼치킨(Munchkin)이란? 소설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난쟁이 먼치킨에서 유례된 말로, 협력하지 않고 혼자서 모든 것을 진행하는 자들에게 사용되었다. 현재는 애니메이션, 만화 등에서 말도 안 되게 강한 캐릭터를 칭하는 말

 

 

‘노오력’은 배신한다

2010년대 들어 인터넷에는 ‘노오력’, ‘노력충’이라는 신조어가 유행했다. ‘노오력’은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므로 가운데 ‘오’자를 늘려 사용하는 것으로 노력의 정도를 강조하는 신조어다. 예를 들면, ‘노오력’과 ‘노오오오오오오력’의 정도는 후자가 몇 배 더 강하다. 얼핏 보면 이 신조어들은 노력의 가치를 인정하고, 노력하는 이들을 격려하는 것처럼 비출 수도 있겠다. 하지만 ‘노력충’으로 오면 정반대의 의미임을 알 수 있다. ‘노력충’은 ‘노력’이라는 명사에 ‘벌레’를 의미하는 ‘~충(蟲)’이라는 한자어를 붙여 노력하는 이들을 비하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런 신조어의 탄생은 무한 경쟁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청년세대의 자조적이고 자기비하적 현상 중 하나다. 이 신조어가 등장했던 당시에는 노력하지 않고, 의지박약한 자신들을 탓하는 기성세대들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단어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이 신조어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성공은커녕 자신의 위치를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의 노력을 비하하는 의미로 전유되었다. 청년세대들은 ‘노오력’에 배신당했고, 아무리 ‘노오력’해도 타파할 수 없는 불공정, 불합리, 부조리한 사회가 그들 앞에 놓여 있다는 현실에 부딪혔다. ‘노오력’은 무시되었고, ‘노오력’ 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는 비하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수저계급론’이 대두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금은동수저’에서 ‘흙수저’에 이르기까지 새롭게 부상한 ‘수저계급론’은 신자유주의 체제 이후의 우리 사회에 자리 잡은 계급주의 의식을 드러낸다. 부모의 계급은 자녀의 계급이 되고, 부모의 직업은 자녀의 직업이 되며, 계층 이동의 사다리는 끊겼다는 보도가 연일 이어졌다.

 

 

먼치킨을 소환하다

청년세대의 절망과도 같은 현실 인식은 웹소설, 웹툰과 같은 콘텐츠에서 보다 즉자적인 욕망으로 드러났다. 비록 현실세계는 ‘이생망’(이번생은 망했다)했지만, 성공한 인생을 살고 싶다는 욕망, 최고가 되고 싶다는 욕망은 대안 세계인 ‘이세계’를 소환했다. ‘노오력’이 보장되지 않는 세계 대신 피안의 세계인 이세계에서 내가 바라는 이상형,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최애, 세계 최강자를 꿈꾼다.

 

<전지적 독자 시점> ⓒ카카오웹툰

 

<전지적 독자 시점>의 김독자 역시 그러하다. 소설이 현실이 되기 전의 김독자는 지방 삼류대학 출신의 계약직 직원이었다. 웹소설을 읽는 것이 취미인 그는 애써 정규직이 되려하지 않는다. 스스로의 능력을 자조하며, 무기력한 태도마저 보인다. 그런 그가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이 펼쳐진 2차 세계관에서는 누구보다 치밀하며, 리더십을 발휘하여 추진력 있는 행동을 보여주는 주체적인 인간으로 변모한다. 작품을 읽는 유저들에게 김독자의 급격한 변화는 전혀 어색하지 않은 것 같다. 개연성도, 핍진성도 담보되지 않는 세계이지만, 유저들의 욕망이 가장 극적으로 맞닿은 지점이기에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이것이 오히려 ‘노오력’의 배신을 맛본 세대의 개연성일 지도 모르겠다.

이세계에서 ‘노오력’의 과정은 생략한다. 인생 N회차를 사는 것이므로 이번 생만큼은 누구보다 앞선 세계에서 우월한 능력을 뽐내며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고 싶다. 회귀, 빙의, 환생은 이세계로 진입하는 장치이기도 하지만, 과정 없이 결과가 숭상되는 세계에서 우월한 인자를 뽐내며 효능감을 발휘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이미 N회차를 살아봤으므로(회귀), 혹은 성인의 정신세계를 지닌 육아물이므로(환생), 혹은 유일하게 나만이 이 책/게임을 독파했기에(빙의) 이세계 최강자가 될 수 있다. 최근 웹소설과 웹툰에서 끊임없이 ‘먼치킨’이 소환되는 이유다. 이렇게 소환된 먼치킨에 의해 유저들은 위치 전도를 통한 전복을 꿈꾼다.
먼치킨류의 웹소설과 웹툰은 로맨스도 생략한다. 목표지향적인 주인공 앞에 인간관계로 인한 피로감과 물리적 서사의 지연은 목표로 향해가는 시간만 지연시킬 뿐이다. 따라서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 방해요소-그것이 인간이라도 상관없다-는 가차 없이 제거된다. 주인공은 전략에 따라 움직였을 뿐이므로 당위적이고, 생산적인 일을 했을 뿐이다. 계산적이며, 철저한 전략은 효율성과 합리성을 우선으로 여기는 세계의 덕목이 된다. 그에 따라 인간은 사물화되고, 인간성은 가치를 잃는다. 1990년대식의 ‘소년물’이 우정과 연대를 통한 내면의 성장서사를 꿈꿨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아이러니한 것은 현실 세계의 불공정, 불합리를 외쳤던 세대들이 정작 먼치킨이 행하는 불공정한 과정에는 입을 꾹 닫고 있다는 점이다. 회귀, 환생, 빙의로 인해 우월한 능력치를 선제적으로 획득한 먼치킨들이 공정할 리가 없다. 그런데 유저들에게 그것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 남들보다 우월한 능력으로 빠르게 이세계의 최강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을 실현해 줄 판타지에서의 즐거움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스노비즘적이기도 하고, 자기완결적인 욕망 충족에 지나지 않는 것일지라도 말이다.
물론 이것이 웹툰, 웹소설이 인기를 끄는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분명 하나의 현상으로 존재한다. 먼치킨이 소환되지 않더라도 이러한 자기완결적인 욕망 충족은 다양한 양상들로 변주되어 재현되어 있다.

 

ⓒ박태준유니버스

 

일례로 10대 남성들이 박태준의 유니버스에 열광하는 이유가 그러하다. 박태준 유니버스는 ‘소외당한 아이’가 ‘일진’이 되는 판타지를 우연으로 점철된 퍼포먼스들로 재현한다. 박태준 작품들이 폭력적이고, 일진 미화물이며, 성인지 감수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장 십 년의 세월 동안 왜 상위 랭크에 기록되는가는 분명 이 시대의 한 현상이며, 진단을 통해 기록할 만한 지점이다. 언젠가 서술할 기회가 있겠지만, 박태준의 유니버스 역시 능력주의를 계급으로 환원한 시대에 대한 우화다. 박태준 판타지의 일진도, 게임 판타지의 먼치킨도 이 시대 청년세대의 현실 인식이자 욕망의 판타지다. 

 

 

 


서은영 
만화연구자 및 만화평론가. 한국만화영상진흥원 포럼위원 위원장. 만화로 한국 근대의 문화를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부천만화대상에서 ‘학술평론상’을 수상했으며, 단행본 『박기정』, 『이정문』 등을 비롯하여 만화와 웹툰 관련 다수의 논문과 평론을 집필하였다. 최근에는 과학기술로 맞닥뜨린 인류의 전환기를 맞아 만화, 웹툰, 웹소설의 상상력이 새로운 리얼리즘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에 대한 연구를 진행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