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작지만 가장 큰 이야기(하현 작가) 첨부이미지 : 그림18.png

*본 게시물은 'K-문학과 다양성’을 주제로 외부 필자가 개인적 견해를 바탕으로 작성한 에세이입니다.

여름이면 개구리 소리에 밤잠을 설치는 동네에서 자랐다. 90년대 중반의 일산은 아직 개발이 덜 진행되어 군데군데 공터가 많은 도시였다. 불법인지 편법인지 모를 꼼수로 세대수를 뻥튀기한 빌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골목 초입에 우리 집이 있었다. 베란다 창문을 통해 보이는 맞은편은 역시 공터였는데, 온갖 잡초가 무성한 그곳이 바로 개구리와 풀벌레들의 아지트였다.
어느 날, 엄마가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맞은편 공터에 집이 생긴대!” 그렇게 시작된 공사는 꽤 길게 이어졌고, 우리의 여름밤은 한결 조용해졌다. 노란 벽돌로 지어진 새집에 이삿짐 트럭이 하나둘씩 도착하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뒤의 일이다.
 
리사는 노란 벽돌집 2층에 살았다. 캐나다에서 온 그는 버스 정류장 근처에 새로 생긴 어학원에서 근무하며 남는 시간에 몰래 집에서 개인 과외를 했다. 마침 초등학교 고학년에 접어든 윗집 언니가 그 수업을 듣기 시작하면서 나도 종종 리사의 집을 드나들었다.
“헬로, 마이 네임 이즈 현. 일레븐 이얼즈 올드.”
서투른 영어로 쭈뼛쭈뼛 말하는 내게 리사는 신기한 상자에 들어 있는 핫초코를 타 주고, 호박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웃어 주었다. 리사의 냉장고에는 각양각색의 자석과 폴라로이드 사진들이 잔뜩 붙어 있었다. “이건 우리 엄마고, 이건 우리 아빠야. 그리고 이건 내 베스트 프렌드 릴리.” 리사의 말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어렴풋이 느꼈던 것 같다. 그가 가진 그리움과 외로움, 타향살이의 서글픔 같은 것들을. 나는 리사를 통해 캐나다를 배웠다. 캐나다라는 나라가 얼마나 큰지는 몰라도 그때의 나에게는 리사가 캐나다보다 컸다.
 
인간은 너무나도 서사적인 존재라서 어쩔 수 없이 설명보다 이야기에 끌리게 된다. 한국계 문학을 접한 외국인들이 자연스럽게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4대에 걸친 재일교포 가족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 『파친코』는 2017년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전 세계 33개국에 수출되었고, 한국계 미국인 여성의 정체성에 대한 고찰과 어머니에 대한 내밀한 속마음을 담은 에세이 『H마트에서 울다』는 2021년 뉴욕 타임스, 아마존 등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도서<파친코> ⓒ인플루엔셜 , <H마트에서 울다> ⓒ문학동네

 

위의 두 작품은 현지에서 먼저 주목받은 뒤 국내에도 번역 출간되었다. 페이지를 넘기다 잠깐씩 눈을 돌릴 때면 리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노란 벽돌집에 놀러 갈 때마다 어렴풋하게 느꼈던 복잡한 감정이 그제야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 이야기에는 그런 힘이 있다. 내 삶과 거리가 아주 먼 사람을 단숨에 코앞까지 끌어당기는 힘이.
책 속의 인물들은 나를 끌어당겼고, 나는 오래된 기억을 더듬어 리사를 끌어당겼다. 어디쯤일지 짐작할 수도 없는 저기 먼 곳에서, 어떤 언어를 쓸지 모를 어느 외국인 독자 역시 그랬을 것이다. 그는 한국이라는 나라를 알고 있을까? 분명한 건 하나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보다 책 속에 등장하는 하나의 인물이 그에게는 더 크게 느껴졌을 것이다.
 
한국계 작가들의 디아스포라 문학은 이제 한국을 알리는 또 하나의 통로가 되었다. 때로는 밖에 있는 사람이 안에 대해 더 성실하고 끈질기게 이야기할 수 있음을 그들의 작품을 통해 깨달았다. 그리고 반대로 ‘한국 밖의 한국’을 알지 못하는 한국인들에게도 그동안 가려져 있었던 새로운 세계를 보여준다. 가장 작은 이야기는 그렇게 가장 큰 이야기로 확장된다.
인간이 이야기에 약한 존재라는 사실이 자주 희망처럼 느껴진다. 서로를 미워하고 오해하고 차별하고 배척하다가도 그를 닮은 주인공이 등장하는 소설을 읽으며 아파할 수 있다는 게 우리가 가진 마지막 가능성 같다. 노란 벽돌집에 살던 리사가 문득 그리워질 때면 책을 읽는다. 책 속에는 수많은 리사가 있다. 나는 여전히 그들을 잘 모르지만 이제야 겨우 알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현
김포와 망원과 일산을 오가며 책을 쓰고, 책을 팔고, 책을 읽는다. 《좋았던 것들이 하나씩 시시해져도》 《우리 세계의 모든 말》 《달의 조각》 등을 썼다. 장래희망은 부유하고 명랑한 독거노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