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를 말하는 한국 SF (심완선 SF 평론가) 첨부이미지 : 그림17.png

*본 게시물은 ‘K-웹소설과 문화다양성’을 주제로 외부 전문가가 개인적 견해를 바탕으로 작성한 칼럼입니다.

  평론가라고 여기저기 다니다 보면 현재의 SF에 관한 질문을 받곤 한다. “이런 책이 새로 나왔던데 보셨어요? 어때요?” 의외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열심히 답하다 보면 결국 이런 말을 하게 된다. “아, 그 책 집에 있는데. 아직 못 읽었어요.” 읽고 쓰기를 전업으로 하는 사람으로서는 이렇게 말할 때마다 약간 쑥스럽다. 마음 같아서는 신간이 나오는 대로 족족 읽고 싶다. 무엇이든 아는 사람이 되어서 SF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는 분들에게 척척 추천도서를 귀띔하고 싶다.
  한때는 가능한 일이었다. 묵은지처럼 다소 쿰쿰한 이야기를 해보자면, 201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 SF는 1년에 열 권도 나오지 않았다. 적으면 두어 권, 때때로 대여섯 권이 출간되었다. 해외 번역작을 합쳐 1년에 삼사십 권쯤 읽으면 ‘다 봤다’고 말할 수 있었다. 반면 지금은 일일이 확인하기 힘겨울 정도로 SF의 수가 늘었다. 그중에서도 한국 작품이 전체의 50% 이상을 차지한다. 한국 SF 어워드에서 발표하는 심사대상 목록을 참고하면, 2022년 동안 공개된 한국 SF는 장편이 사십여 권, 단편이 사백여 편이다(숫자를 정확하게 쓰지 않은 이유는 재출간 등의 사유로 목록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해외 작품을 더하면 수가 두 배로 늘어난다. 웹소설, 웹툰, 영상 작품까지 고려하면 정말 버거울 정도로 긴 목록이 만들어진다. 이제는 SF만 몇십 권을 읽어도 ‘다 봤다’고 하지 못한다. 조금 오래 SF를 좋아해 온 독자로선 해마다 얼떨떨하다. 덕분에 자꾸 쑥스러워지는데, 물론 반가운 일이다.

 

ⓒ클립아트코리아

 

  그리고 양적 증가와 더불어 나타난 변화가 있다. 한국 SF의 특징 혹은 경향이라 할 만한 모습이 형성되고 있다는 점이다. 작품 수가 적을 때는 동시대 작품들의 전반적인 모양새를 판별하기가 불가능했다. 어느 정도 집단이 이루어진 지금은 드디어 ‘트렌드’를 논할 수 있다. 모종의 유행이 눈에 띌 정도로 형성되고, 여러 작품 사이에 나타나는 유사성이 우연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을 만큼 표본이 모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최근 한국 SF에서 나타나는 경향은 크게 두 가지, 포스트아포칼립스와 반차별이다. 그중에서도 포스트아포칼립스 경향은 양적으로 명확하게 짚을 수 있다.
  포스트아포칼립스는 ‘대재앙 이후’를 뜻하는 말로, 거대한 멸망을 다루는 SF의 하위 장르를 가리킨다. 포스트아포칼립스 작품에서는 기후변화로 생태계가 사그라지거나, 핵폭탄이 연쇄적으로 터져 격변이 일어나거나, 정체불명의 전염병으로 인류가 사멸하는 일이 벌어진다. 주로 가까운 미래에 어느 순간 표면화 되는 멸망이다. 기존의 문명은 종언을 고하고, 사람들은 더는 예전 시대의 생활로 돌아가지 못한다. 그러니 살아남은 이들이(그들은 독자와 같은 인류가 아닐 수도 있다) 새로운 환경에서 어떻게 존재하는 지가 중요해진다.
  작년에 출간된 장편 중에서 포스트아포칼립스에 속하거나 적어도 기존의 생활방식을 유지하기가 불가능해진 세상을 그리는 소설은 대략 열네 권이다. 삼분의 일이 넘는 비율이다. 그중에서 제일 두드러지는 멸망 요인은 환경오염으로 인한 기후위기와 생태계 파괴였다. 예를 들어 『세 개의 밤』은 환경파괴로 인해 국가 체계가 무너지고 거대 기업이 간신히 체제를 형성하는 사회를 묘사한다. 『막 너머에 신이 있다면』의 미래에서는 지구에서 식량을 생산하기가 어려워져 모두가 기근에 시달린다. 『오로라 2-241』에서도 기후변화와 거대 기업의 독점으로 인해 대부분의 식량 종자가 사라진다. 이외에도 『휴먼의 근사치』는 비가 멈추지 않는 이상기후 이후를, 『굿 피플 프로젝트』와 『자살 신호가 감지되었습니다』는 미세먼지가 지나치게 심각해진 세상을 설정한다. 탐색 범위를 넓히면 더욱 많은 작품이 포함된다.

 

 

 

ⓒ교보문고

 

  이것은 동시대적 감수성이자 현재 우리의 관심사다. 포스트아포칼립스는 당대의 두려움을 반영한다. 핵전쟁의 위기가 코앞에 있었던 1940년대 이후 영미 SF에는 핵전쟁 이후를 상정하는 포스트아포칼립스 작품이 나왔다. 그것이 그 시절 작가와 독자가 반응하는 멸망 시나리오였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기후위기에 주목한다. 기후 문제는 우리 시대의 중대한 현안으로 점차 자리를 잡았다. 한국 SF에 드러나는 포스트아포칼립스 경향은, SF가 현실과 거리가 멀다는 오해와 달리, 우리가 발 디딘 현실에 기민하게 반응한 결과다.

 

 

ⓒ구글엔그램

(1920년부터 2019년까지 climate와 climate change 및 apocalypse라는 단어의 사용 빈도를 구글 엔그램에서 검색한 결과. 구글 엔그램은 구글이 전자화하여 보유한 도서 안에서 특정 단어가 얼마나 언급되는지 보여준다.)

  SF는 가상의 미래를 묘사하면서 미래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형상화하곤 한다. 그리고 전 지구적 변화를 맞이하고 있는 지금 시점이야말로 SF가 절실히 필요한 때일지도 모른다. 국가와 시대를 뛰어넘는 거대한 변화를, 그 이후의 삶을 상상하기 위해서.

 

 

 

 


심완선
SF 평론가. 책과 글쓰기와 장르문학에 관한 글을 쓴다. SF의 재미와 함께, 인간의 존엄성 및 사회적 평등과 문학의 연결 고리에 관심이 있다. 지은 책으로 『SF와 함께라면 어디든』, 『우리는 SF를 좋아해』, 『SF는 정말 끝내주는데』, 『SF 거장과 걸작의 연대기』(공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