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게시물은 'K-게임과 다양성’을 주제로 외부 필자가 개인적 견해를 바탕으로 작성한 에세이입니다.
순전히 블랙핑크 때문이었다. 일단 그 이야기는 조금 있다 다시 꺼내도록 하겠다. 사실 나는 게임을 그리 즐기는 어른은 아니었다. 1970년대 태어난 구시대의 인간으로서 주로 PC 게임을 했다. 심지어 업데이트도 하지 않은 옛날 버전의 <스타크래프트>를 했다. 내가 군대에서 제대한 1998년은 PC 게임이라는 게 한국에서 베수비오 화산처럼 폭발해 모든 10대와 20대들을 용암처럼 쓸어버린 해였다. 강의가 끝나면 모두가 말했다. “스타 한 판 하자" 게임을 그리 잘하지 못하는 나는 그저 보기 좋다는 이유로 프로토스족을 선택했다. 테란과 저그족이야말로 이 게임을 지배하는 강한 종족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그래도 캐리어를 생산해 적의 기지 위에서 파리처럼 윙윙대는 인터셉터를 풀어놓는 건 꽤 즐거운 일이었다. 결국 테란의 탱크들이 밀려오는 순간 비싼 미네랄을 투여해 생산한 캐리어들은 우주의 빛처럼 폭발해 사라졌다. 나는 거의 항상, 졌다.
프로게이머 시절 임요환과 홍진호 전설의 3연벙(출처=온게임넷 캡처)
잠깐. 나는 첫 문단에서 ‘프로토스’니 ‘캐리어'니 ‘인터셉터’니 하는 단어들을 마구 열거하는 게 혹시 이 글을 읽기 시작한 독자들을 헷갈리게 만들지 않을까 걱정이다. 아니다. 가만 생각해 보니 그런 걱정은 접어도 좋을 것이다. <스타크래프트>를 모르는 한국인은 거의 없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나는 요즘도 유튜브로 임요한과 홍진호의 전설적인 대결을 다시 보곤 한다. 한국이 어떤 나라인가. <스타크래프트>를 시작으로 e-스포츠라는 걸 만든 나라다. 오로지 그것만 중계하는 케이블 채널만 여럿이던 나라다. 지금은 그 유행이 라이엇 게임즈의 <리그 오브 레전드>로 넘어가기는 했다만, 지구에서 이처럼 게임에 진심인 나라는 없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게임이라는 세계를 잊고 있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멈추는 순간이 온다. 이를테면 나는 예전만큼 만화를 즐겨보지 않는다. 이상하게 사람이 나이가 들면 칸과 칸으로 구성된 화법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기 시작한다. 그래서 내가 하는 게임은 모바일 게임 <애니팡>이 유일했다. 회사 가기 전 주로 화장실 변기에 앉아서 뭔가를 팡팡 터뜨리다 보면 변비 해결에도 도움이 되고 회사 가기 싫은 마음을 추스르는 데도 도움이 됐다. 학생과 직장인의 다른 점은, 직장인은 <애니팡>을 하다 막히면 돈을 내고 아이템을 사서 다음 단계로 진출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가만 생각해 보니 내가 그 게임에 쓴 돈을 모조리 모은다면 프라다 재킷 한 벌 정도는 살 수도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앵그리 버드> 게임에도 마찬가지의 돈을 썼다. 모바일 게임이라는 건 모르는 사이에 돈 새는 바가지다.
어느날 친구가 말했다. “오빠 배그 해?” 나는 말했다. “배그가 뭔데?” 내 친구는 오랜 경력을 자랑하는 배우다. 배그는 <배틀그라운드>의 준말로서, 한국 게임 회사 ‘크래프톤'이 출시한 모바일 일인칭 슈팅 게임이었다. 나는 준엄하게 꾸짖었다. “여배우가 취미가 모바일 게임이 뭐니. 그것도 슈팅 게임이 뭐니. 어디 인터뷰에 가서는 꽃꽂이라고 해 제발" 물론 농담이다. 게임에 여성과 남성이 어디 있단 말인가. 여하튼 나는 친구의 요청으로 <배틀그라운드>를 스마트폰에 깔았다. 하지만 초반에 몇 번을 한 다음 오랫동안 들어가지 않았다. 문제는 역시 하나였다. 나는 게임을 참 못한다. 프로토스족을 선택해 만날 맞아 터지던 <스타크래프트> 시절과 마찬가지로, 나는 매번 너무 이르게 사망했다. 함께 팀을 만들어 진행하던 친구들에게 미안하고 민망해서 훈련장 모드로 훈련만 열심히 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들어가질 않았다. 행정병으로 근무한 탓에 사격 훈련을 거의 하지 않은 나의 군대 시절을 원망했다.
게임 <배틀그라운드> (이미지 제공=크래프톤)
그러나 2022년의 어느날, 나는 다시 배그로 들어갔다. 블랙핑크 콘서트가 <배틀그라운드> 모바일 게임 내에서 진행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블랙핑크의 광적인 아재 팬 중 한 명으로서, 그렇게 따라 하기 힘들다는 리사와 제니의 랩도 따로 시간을 내어 외우는 사람이다. 인게임 콘서트는 처음이었다. 진짜 콘서트를 보는 것만큼 흥분되는 일이었냐고? 물론이다. 현실의 나는 블랙핑크 콘서트에 가지 못할 것이다. 열정적인 어린 팬들만큼 빠른 손놀림으로 티켓팅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중년의 손가락은 둔탁하기 짝이 없다. 모바일 게임 속이라면 다르다. 나는 게임 속 세계에서 블랙핑크 콘서트에 참여할 수가 있다. 이건 정말 흥미진진한 일이다. 게임은 단순한 게임의 영역을 넘어서고 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에서처럼, 모바일 게임은 일종의 가상현실 플랫폼으로서 기능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이야기하던 메타버스의 가능성은 어쩌면 게임이 멱살을 잡고 끌고 가게 될 것이다.
2022년 배틀그라운드 블랙핑크 인게임 콘서트 이미지 (제공=크래프톤, YG엔터테인먼트)
나는 요즘 ‘애플 비전 프로'의 유튜브 리뷰들을 보며 다음 버전의 가격이 얼마나 떨어질지를 기대하는 중이다. 결국 디지털과 현실 세계는 뒤섞일 것이다. 나는 그 미래적으로 무지막지하게 생겨먹은 고글을 쓰고 언젠가는 애플 비전용으로 출시될 <배틀그라운드>에 참여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 그 시기가 오면 내가 지금 가장 사랑하는 아이돌 그룹 ‘뉴진스'의 인게임 콘서트도 열릴지 모른다. 인게임 콘서트용 응원봉 아이템을 구입해야 한다면 정말이지 기쁜 마음으로 카드를 꺼낼 것이다.
김도훈
작가 겸 대중문화평론가. 고양이 키우는 남자.
영화전문지와 패션지의 기자로 경력을 쌓았고 현재는 허핑턴포스트코리아의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장르를 넘나들며 다양한 분야의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