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바닥 속 조용한 위로(하현 작가) 첨부이미지 : 3.png

 

*본 게시물은 'K-게임과 다양성’을 주제로 외부 필자가 개인적 견해를 바탕으로 작성한 에세이입니다.

 

아마도 열 살 무렵이었을 것이다. 내 방 서랍장 맨 아래 칸에는 조그만 상자가 하나 있었다. 어디선가 선물로 들어온 화과자를 먹고 남겨둔 그 오렌지색 상자에는 지폐 몇 장이 들어 있었다. 자금의 출처는 매달 받는 용돈 외에 가끔 생기는 보너스. 엄마 심부름을 하고 받은 천 원짜리 한 장, 문제집을 사고 남은 거스름돈을 몰래 빼돌려 만든 오천 원짜리 한 장, 오랜만에 만난 친척 어른에게 받은 만 원짜리 한 장…. 그렇게 차곡차곡 모은 돈을 들고 가는 곳은 언제나 똑같았다.

집 근처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30분쯤 가면 도착하는 이웃 동네에는 큰 서점이 있었다. 평소에는 새로 나온 책들과 아기자기한 학용품을 구경하러 가는 곳이었지만 상자를 털어 주머니가 든든한 날에는 에스컬레이터 옆에 있는 게임 코너로 직행했다. 아직 온라인 게임이 활성화되지 않았던 그 시절에는 마치 책을 사듯 게임 CD를 샀다. 물론 책보다는 훨씬 비쌌기에 게임을 살 때는 언제나 신중해야 했다. 오래 플레이해도 질리지 않을 것인가? 너무 쉽거나 어렵지는 않은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과 비슷하지는 않은가? 까다로운 심사를 거쳐 구매한 CD들은 그 무엇보다 소중한 보물이었다.

명예의 전당에 오르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1년간 카페를 운영하는 <쿠키샵>, 디자이너의 꿈을 안고 망해가는 의상실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코코룩>, 만화는 안 봤지만 게임은 열심히 했던 <하얀 마음 백구>. 그 게임들은 경기도 외곽에 사는 조용하고 소심한 초등학생이었던 나를 단숨에 다른 세계로 데려다주었다. 공부도, 친구도, 가족도 신경 쓸 필요 없는 세계. 오직 꿈과 희망과 모험만 있는 세계로.

 

게임<하얀마음 백구>스크린샷


함께 CD를 모았던 동생은 온라인 게임의 시대가 열린 뒤 한층 더 열렬한 게이머가 되었지만 나는 그 반대였다. 화려한 그래픽과 부지런한 업데이트로 무장한 새로운 시대의 게임에 나는 아무런 매력도 느끼지 못했다. 게임에서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 역시 그랬다. 나는 게임을 하고 싶은 거지 친구와 놀고 싶은 게 아닌데. 그렇게 게임과 멀어졌다. 세상에는 게임 말고도 재밌는 게 많았으므로 그게 딱히 아쉽지는 않았다.

다시 게임에 빠진 건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지나 20대 후반이 됐을 때였다. 이런저런 고민에 잠들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던 어느 밤, 우연히 친구의 SNS에서 게임 속 한 장면을 캡처한 게시물을 봤다. 사실 처음에는 그게 게임인 줄도 몰랐다. 게임이라고 하기엔 너무 심심한 화면 속에는 그림판으로 대충 그린 것 같은 캐릭터가 벽에 기대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내 시선을 사로잡은 건 그 위로 떠 있는 말풍선이었다. “언젠가 인생에 밝은 날이 올 거라고 믿어?” 유저가 선택할 수 있는 대답은 단 두 개였다. “응” 그리고 “반드시” 거기에 마음을 빼앗겼던 것 같다.
 

비내리는 단칸방 소개 영상

https://youtu.be/MZr9qEOcDQM

 

<비 내리는 단칸방>은 어둡고 축축한 단칸방에 홀로 있는 우울한 친구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게임이다. 대화를 통해 호감도를 올리고, 빗물과 마음을 모아 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아이템을 구매할 수 있다. 단출한 그래픽과 달리 세심하게 준비된 요소들이 게임 곳곳에 숨어 있지만 플레이하는데 엄청난 노력이나 많은 시간이 들지는 않는다. 이런 유형의 게임을 ‘방치형 힐링 게임’이라고 부른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이 게임에서 내가 제일 좋아했던 건 꿈 일기다. 게임 속 아이템인 이불을 구매하면 주인공이 잠을 자는데, 잠에서 깬 뒤에는 꿈 일기를 볼 수 있다. 어떤 날에는 이런 일기가 나왔다. “뒤에서 무언가 쫓아와서 달리고 있었다. 그때 새가 하늘에서 나타나 나를 태워주고 날아갔다. 안심하고 바람에 몸을 맡기며 하늘을 날아갔다.” 부끄럽지만 이 일기를 읽다가 조금 울었다. 그때 날 힘들게 했던 일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이제 다 잊어버렸는데 이 짧은 글은 오래오래 기억에 남아 있다.

팍팍한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조용한 위로와 감동을 준 <비 내리는 단칸방>은 2017년 플레이스토어 ‘인디 게임의 열정을 플레이하라’에 선정되었다. 누적 다운로드 80만 건을 기록한 뒤에는 같은 제목의 그림 에세이까지 출간되었다.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 같았던 시기에 좋은 친구가 되어준 게임이 또 다른 콘텐츠로 확장해 나가는 모습을 보며 초기 유저로서 벅찬 뿌듯함을 느꼈다.

여전히 세상에는 싸우고 부수고 빼앗고 경쟁하는 게임이 더 많다. 누구보다 게임에 진심인 동생이 컴퓨터 앞에서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죽여!”다. 누가 뭐래도 주류는 그쪽인 것 같다. 그래서 더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게임이 쏟아져 나오는 거겠지. 하지만 저기 한구석 단칸방 같은 곳에는 어린 내가 좋아했던 평화롭고 다정한 게임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방치형 힐링 게임’이라는 장르는 그들을 통해 유지되고 확장되며 게임을 통해 위로받는 경험을 선사하고 있다.

 

 

(좌)<고양이는 정말 귀여워> ⓒ끼룩스튜디오, (우)<별빛바다 키우기> ⓒ파스텔

 

귀여운 고양이를 돌보며 나만의 고양이 마을을 만드는 <고양이는 정말 귀여워>는 출시 10일 만에 앱스토어 무료 게임 순위 3위에 오르며 2024년 현재 500만 다운로드를 기록했다. 1인 인디 개발 스튜디오가 만들어 낸 놀라운 성과다.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바닷가 밤거리를 화려한 밤의 시장으로 발전시키는 <별빛바다 키우기> 역시 6개월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10만 다운로드를 기록하며 많은 유저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한국 모바일 인디 게임의 전성기는 과연 언제였을까? 누군가는 이미 오래전에 지나갔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 말한다. 무엇이 정답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것만은 확실히 안다. 유료 아이템을 구매하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없는, 똑같이 싸우고 똑같이 경쟁하는 양산형 게임에 피로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것. 그 틈에서 다채로운 소재와 특색 있는 그래픽으로 자기만의 자리를 만들어 나가는 인디 게임을 나는 앞으로도 계속 응원할 것이다. 빼곡하게 꽂혀 있던 책만큼이나 다양한 이야기를 품고 있었던 그 옛날의 CD게임을 추억하며.

 

 

하현
김포와 망원과 일산을 오가며 책을 쓰고, 책을 팔고, 책을 읽는다. 《좋았던 것들이 하나씩 시시해져도》 《우리 세계의 모든 말》 《달의 조각》 등을 썼다. 장래희망은 부유하고 명랑한 독거노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