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섦을 받아들여 익숙함을 반성하는 K팝(김정원 음악인류학자) 첨부이미지 : 4.png

*본 게시물은 ‘K-팝과 문화다양성’을 주제로 외부 전문가가 개인적 견해를 바탕으로 작성한 칼럼입니다.

작년은 ‘문화 대통령’이란 별칭으로 한국 대중문화 패러다임을 변화시킨 ‘서태지와 아이들’의 데뷔 30주년이 된 해였다. 흔히들 K팝이 한류와 더불어 시작된 것으로 여겨 H.O.T.를 위시하여 이른바 1세대 아이돌 가수들로부터 K팝 역사를 이야기한다. K팝이라는 용어만 놓고 본다면 시작점은 분명히 한류의 궤도에 있다. 그러나 K팝에 담긴 문화다양성의 측면에서 볼 때 그 현상은 한류 이전 한국 대중문화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난 그 현상의 원류를 서태지와 아이들에서 찾는다. 서두에 서태지와 아이들을 언급한 이유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미국 대중음악 장르 힙합의 요소인 랩과 브레이크 댄스를 도입한 곡 〈난 알아요〉로 1992년에 데뷔했다. 서태지와 아이들보다 먼저 음악에 랩을 포함시키고 무대에서 브레이크 댄스를 춘 가수들도 한국 가요계에 있었다. 그렇지만 한국인들에겐 새롭고 낯선 힙합이라는 장르가 비롯된 문화, 그리고 그 문화를 일궈낸 사람에 대한 이해를 재현해냈던 한국 가수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최초가 아닐까 한다. 1992년 8월 15일에 방영됐던 MBC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에서 선보인 〈난 알아요〉가 그 사례이다.

 

Taijiboys - I know, 서태지와 아이들 - 난 알아요, Saturday Night Music Show 19920815

 

 

이 무대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은 역시 데뷔 음반에 수록된 〈난 알아요〉의 영어 버전(원곡 한국어 가사의 영역은 아닌) 〈Blind Love〉를 통합한 공연을 보여준다. 멤버들은 악구, 악절에 따라 두 언어를 넘나드는 노래와 랩을 하면서 브레이크 댄스는 물론 당시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던 춤을 추는데, 리더 서태지의 무대 차림새가 무척 인상적이다.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 뉴욕 양키즈 셔츠를 입고, 미국 플로리다 대학교 풋볼팀 게이터스의 마스코트인 악어가 측면, 플로리다라는 글자가 정면에 수놓아진 야구 모자를 썼으며, 발목까지 올라오는 농구화를 신었다. 이 차림새를 그때 젊은이들 사이에서 저런 패션 스타일이 대세였으니 유행의 반영이겠거니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서태지가 착용한 아이템들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사실들이 발견된다. 상의에 인쇄된 양키즈 팀의 홈구장은 뉴욕시 브롱크스 자치구에 위치하는데 브롱크스는 바로 힙합의 탄생지이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인 1973년, 브롱크스 빈민가에 사는 아프리카계 젊은 미국인들이 스스로 삶에 대해 노래하고 춤추던 문화가 힙합의 시작이었다. 플로리다 역시 힙합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다. 플로리다 주의 대도시 마이애미가 미국 남부 힙합 중심지 중 하나다. 즉 서태지는 1990년대 초 한국엔 생소했던 가창(랩)과 춤(브레이크 댄스)을 단지 실행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추구하는 음악 장르가 어디서, 누구에 의해 비롯되었는지 자신이 이해한 바를 차림새로써 드러내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의 농구화가 국산 브랜드 프로스펙스 제품인 점은 해외 문물의 한국화, 다시 말해 낯선 것이 반영되어 익숙한 것으로 다시 만들어지는 과정을 시사한다.

 

2017년 9월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펼친 서태지 25주년 공연 당시 방탄소년단(BTS)과 서태지 (ⓒ서태지컴퍼니)

 

IMF가 시작된 1990년대 후반, 기업체들이 줄도산하고 여러 산업이 쇠락의 길을 걸었던 사태와 대조적으로 한국의 대중문화 산업은 도리어 성장했다.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는 국민들이 대중 매체에서 위안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특히 부모의 실직으로 불안정한 가정환경에서 청소년들은 입시 중압감, 학교 폭력, 사랑과 희망 등 그들 일상을 노래하며 춤추는 또래 아이돌 스타에게 더욱 의지했다. 한편 중국 등 아시아 국가들에 수출된 대중문화 상품은 현지에서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중국의 젊은이들이 한국 드라마, 대중음악에 열광하는 현상을 현지 언론은 ‘한류’로 묘사했다. 한류와 함께 K팝이라는 용어 또한 출현했다. 아시아 지역 음악 방송과 음반 상점에서 아이돌, 비아이돌 가수들 모두를 망라한 한국 대중음악을 소개할 때 쓴 표현이 K팝이었다.

 

앨범 당시 슈퍼주니어와 라틴 팝 가수 레슬리 그레이스 (제공=SM엔터테인먼트)

 

아시아를 필두로 전 세계인들과 만나 교류하며 K팝은 보다 다양한 문화를 담아내고자 했다. 슈퍼주니어가 2018년 발표한 정규 8집 리패키지 앨범 타이틀은 〈Lo Siento〉, 스페인어로 '미안하다'는 뜻이다. 스페인어 제목이 암시하듯 라틴 팝 풍 음악인 이 곡에는 가사 중에도 Lo siento 뿐 아니라 여러 스페인어가 등장한다. 특히 문장 단위 스페인어 가사는 도미니카계 미국인 라틴 팝 가수 레슬리 그레이스가 참여해 피처링했으며, 곡의 뮤직비디오에도 출연해 슈퍼주니어 멤버들과 노래하고 춤춘다. 시도하려는 음악 장르의 본 고장 아티스트와 동반 작업했다는 점에서 슈퍼주니어의 〈Lo Siento〉는 K팝의 문화다양성을 논의할 때 본보기가 된다

 

SUPER JUNIOR 슈퍼주니어 'Lo Siento (Feat. Leslie Grace)' MV

 

 

슈퍼주니어 외에도 바람직한 다른 사례들도 있고 반대로 비판적인 관점에서 다시 봐야할 K팝 가수들과 음악이 다소 있지만, 지면 관계상 여기서 마쳐야겠다. K팝을 연구하고 강의하는 음악인류학자이자 K팝을 즐겨 듣고 아끼며 그 문화에 속한 팬의 한 사람으로 바람이 있다. 가수를 비롯해 창작자, 제작자 등 종사하는 이들 모두가 K팝을 단지 특정 음악 장르로만 치부하지 않기를, 전 세계 다양한 사람들과 문화들을 반영해 반성의 기회까지 제공할 수 있는 유용한 수단으로 활용하길 바란다.

 

김정원
케이팝 및 팬덤, 한국의 음악 문화, 젠더가 주 연구 관심사인 음악인류학자이다. 학부에서 바이올린과 음악학을 전공하고 무용이론을 부전공하였다. 여성학 전공으로 서울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마친 뒤 미국으로 건너가 음악인류학 전공 석사(The University of Pittsburgh)와 박사학위(The University of California, Riverside)를 취득했다.
케이팝 한국 여성 팬덤을 연구한 박사학위논문 발표 후 귀국하여 현재까지 연세대학교에서 외국인 학생을 대상으로 한국 대중문화(한류), 케이팝 교과목들을 강의하고 있으며, 2021년 가을부터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사 공통필수 과목인 “예술가의 젠더 연습” 강의를 담당하고 있다. 《대중음악》, 《이화음악논집》, 《문화산업연구》에 케이팝 관련 논문들을 게재하였고, 저서로 《음악인류학자의 케이팝하기(2022)》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