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 밖으로 꺼내면 어쩔 수 없이 유치해져서 아무도 모르게 속으로 삼키는 말이 있다. 고등학교 시절 사회 과목을 가르쳤던 우리 반 담임 선생님은 틈만 나면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곧 나’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조금 더 살아 보니 어떤 말을 뱉는지 보다 어떤 말을 삼키는지가 그 사람을 더 정확하게 설명해 주는 것 같다. 내 안 어딘가에 찰랑찰랑 고여 있는 말. 뜨거운 커피처럼 후후 불어 꿀꺽 삼켜 버린 말. 그런 말 중 하나를 여기 꺼내 보려고 한다. 조금 유치해질 각오를 하고.
얼마 전 일이다. 집에서 가까워 종종 들르는 동네 채소 가게에 당근을 사러 갔는데 오랜만에 만난 사장님이 불쑥 말을 걸었다.
“왠지 오늘 오실 것 같았어요.”
“앗, 정말요?”
“네, 제가 촉이 좋거든요.”
단골이라고 살갑게 인사를 건네거나 장난을 치는 일이 좀처럼 없는 사람이라서 그 말이 더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내 주변에는 왜 이렇게 촉이 좋은 사람이 많을까? 아르바이트를 하면 동료 언니가 운세를 봐주고, 공모전에 참가하면 친구가 결과를 정확하게 예측하고, 당근을 사러 가면 내가 올 걸 미리 알고 있었던 사장님을 만난다. 신묘한 능력을 가진 그들과 다르게 나는 예지몽 한 번 꿔 본 적 없는 평범한 사람이다. 감을 믿느니 차라리 동전을 던지고 마는.
하지만 이런 내게도 아주 드물게 ‘그 순간’이 찾아온다. 앗, 이거다! 머릿속에서 작은 폭죽이 팡 터지듯 느낌이 오는 순간. 이 느낌은 아직 별로 유명하지 않지만, 곧 크게 성공할 스타를 알아볼 때만 찾아오는데, 지금까지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적중률이 제법 높은 것 같다.
ⓒ클립아트코리아
이날치를 처음 본 순간도 그랬다. 평소처럼 유튜브의 바다를 헤엄치던 내 눈앞에 나타난 심상치 않은 사람들. 뭐지?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우연히 발견한 그들의 공연 영상은 단숨에 나를 사로잡았다. “음악의 근본은 락! 락의 근본은 베이스!”라는 말을 가슴 깊이 새기고 늘 새로운 밴드를 찾아 어슬렁거리는 내게 그 무대는 이름조차 들어 본 적 없는 신대륙 같았다. 공연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베이시스트가 이상한 사건에 휘말려 조선시대에 뚝 떨어진다면 이런 음악을 만들지 않았을까. 둥둥둥 세련된 베이스 연주 위로 울려 퍼지는 단단하고 한국적인 목소리. 피자와 파김치처럼 극과 극 같은 이 조합이 너무도 환상적으로 멋져서 잠시 충격에 빠졌다.
나는 좋아하는 게 생기면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녀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이 멋진 음악을 한 명에게라도 더 알리고 싶은 마음에 열심히 떠들었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시큰둥했다. 이상하다, 나는 너무 좋은데 다른 사람들은 안 그런가? 그때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머지않은 미래에 대한민국을 한바탕 휩쓸 이날치 신드롬을.
그날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앰비규언스 댄스 컴퍼니와 함께 참여한 한국관광공사 광고 영상이 그야말로 대박을 터뜨리며 이날치는 국악의 새로운 아이콘이 됐다. 여기에도 저기에도 범이 내려오다가 마침내 유튜브 인기 급상승 동영상 1위에 오른 이날치를 발견했을 때, 나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소리쳤다.
“거봐, 내가 뜬다고 했지!”
ⓒ클립아트코리아
곧 유명해질 밴드를 미리 알아봤다는 뿌듯함에 한껏 취해 있던 나는 얼마 뒤 그보다 훨씬 큰 기쁨을 발견했다. 그건 바로 이날치 신드롬을 통해 전보다 다양한 음악을 즐기게 된 우리의 모습이었다. 퓨전 국악과 판소리 뮤지컬, 현대식으로 재해석한 민요를 찾아 듣다 보면 댓글 창에는 언제나 나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뭐야, 나 국악 좋아하네!” 지루하고 따분한 장르라고 생각했던 국악의 매력을 새롭게 알아 가는 사람들.
가야금과 첼로의 합주에 빠져들고, 피아노와 함께하는 판소리에 감탄하는 동안 우리가 즐기는 음악의 스펙트럼은 조금씩 확장됐다. 그래, 맞아. 음원 사이트의 실시간 차트 밖에는 이런 노래들이 있었지. 늘 듣던 것과 다른 새로운 음악으로 플레이리스트를 채우는 일이 즐거웠다.
음악은 사람의 영혼을 건드리고, 사람은 자신의 영혼을 건드리는 것들을 통해 자란다. 그렇다면 더 다양한 음악이 나를 건드리고 갔으면 좋겠다. 평생 좋아할 일 없을 줄 알았던 국악이 내 마음의 한 부분을 힘껏 흔들어 놓았던 것처럼.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내가 알지 못하는 노래를 들으며 생각하겠지. ‘이상하다, 나는 너무 좋은데 다른 사람들은 안 그런가?’ 나에게도 물론 그런 노래가 몇 개 더 있다. 아직 언제일지 모를 미래의 어느 날, 서로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이렇게 소리칠 우리를 상상해 본다.
“거봐, 내가 뜬다고 했지!”
하현
김포와 망원과 일산을 오가며 책을 쓰고, 책을 팔고, 책을 읽는다. 《좋았던 것들이 하나씩 시시해져도》 《우리 세계의 모든 말》 《달의 조각》 등을 썼다. 장래희망은 부유하고 명랑한 독거노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