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신의 놀이 속에서 살고 있다면 (김선오 시인) 첨부이미지 : 김선오 7.jpg

나는 게임을 잘 하지 못한다. 능숙하게 하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라 여간해선 게임 자체에 흥미를 느끼지 않고, 시작하더라도 얼마 못 가 싫증을 낸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능숙하게 하지 못한다는 말 역시 결국 맞는 뜻이 되겠다)

어린 시절에는 친구 따라 당시 유행하던 RPG 게임 같은 것을 몇 종류 시도해보기도 했지만 그 역시 이삼 일 만에 때려치웠다. 회사에 다니던 시절에는 직장 생활에 낙이 필요하여 점심시간에 동료들과 포켓몬을 잡으러 판교 거리를 돌아다니기도 해보았지만 처음 일주일 정도 신나게 포켓몬을 쓸어 담고 나자 곧장 흥미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스마트폰에 저장되었던 적 있는 모바일 게임의 개수는 명절에 만난 초등학생 사촌 동생의 은밀한 부탁에 의한 두세 가지가 전부다. 체스 같은 보드게임은 좋아하지만 놀이공원은 지루해하는 성향으로 미루어보았을 때, 아마 누군가 멍석을 깔아주는 놀이판에 매력을 잘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그랬던 내가 그나마 꽤 오랜 시간 몰두했던 (그마저도 한 달을 채우지는 못하였으나) 게임이 있는데, 동년배라면 누구나 한 번쯤 해본 적 있는 ‘심즈’가 바로 그것이다. ‘심즈’는 가상의 인생을 시뮬레이션하는 게임으로 캐릭터를 커스터마이징하여 그들의 삶을 만들어나가는, 인형놀이에 영감을 받아 제작된 게임이다.

▲인생 시뮬레이션 게임 <심즈> 시리즈 (왼쪽부터) <심즈3>와 <심즈4> (출처=EA)

 

심즈의 세계에서는 플레이어가 일종의 신의 역할을 맡는다. 신의 놀이가 어찌나 재미있는지 심즈를 다운 받고 며칠 연속 밤을 새웠다거나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심(sim, 게임 심즈의 캐릭터를 일컫는 말)으로 보이기 시작했다는 주변인들의 간증은 익히 들어온 터였다. 출시 전 심즈를 제작한 회사에서는 그저 캐릭터의 삶을 만들어낼 뿐인 이 게임이 분명 인기를 끌지 못하고 망할 것이라 우려했다고 하는데, 막상 온 지구의 사람들은 열광하며 자신이 창조한 심즈의 가상세계 속으로 빠져들었다. 오죽했으면 심즈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고 한다.

 

🔗 화사 X 심즈4 'Play With Life' 공식뮤직비디오

 

간증을 마친 자들의 퀭한 두 눈이 이미 해당 게임의 매력을 증명하고 있었기에 호기심이 일기도 했지만, 가장 흥미로웠던 지점은 심즈에서 반영하고 있다는 실제 세계의 다양성이었다. 

게임을 다운 받아 플레이해 보니 우선 심(sim) 피부색 등 외양을 인종적 구분에 제한 받지 않고 다채롭게 설정할 수 있었다. 

심즈 제작진은 장애를 가진 심을 개발하기 위해 장애를 가진 실제 플레이어의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고 한다. 뱀파이어나 인어 등 전설 속 반인반수의 존재 역시 시뮬레이션 속에서 살아가게 할 수 있으며, 이미 오랜 시간 심즈를 플레이해온 친구의 말에 의하면 상대 심의 성별과 인종과 관계없이 연애나 결혼, 임신과 출산 역시 가능하다고 한다. 시뮬레이션 게임 안에서 현실과는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동시에, 사회적으로 혹은 생물학적으로 제한 받고 있는 세계의 다양성을 시뮬레이션 내부에서 재현할 수 있다니 정말이지 매력적이지 않은가.

▲게임 <심즈4>의 한 장면 (제공=EA)

 

옥스퍼드 대학의 철학자 닉 보스트롬은 우리가 사는 우주가 모의현실이라는 ‘모의실험 가설’을 제기한 바 있다. 즉 지구의 구성원인 우리 역시 이 우주 밖의 지성체가 구동한 시뮬레이션 안에 살아있는, 일종의 캐릭터들이라는 가설인데, 심즈의 심들이 자신이 시뮬레이션이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듯 우리 또한 이 세계가 시뮬레이션이라는 사실을 알 수 없다는 내용이다.

▲옥스퍼드 대학교 인류미래연구소(FHI) 소장을 맡고 있는 철학자 닉 보스트롬 (제공=FHI)

 

우주의 구성 원리가 프로그래밍의 원리와 비슷하다는 점, 인간을 구성하는 것이 결국 DNA에 입력된 ‘정보값’이라는 점, 관찰하는 순간 파동이 입자로 변하는 양자역학의 원리 등이 그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 몇몇 과학자들과 철학자들, 그리고 대중들에 의해 지지되기도 또 반론을 사기도 했으나 만약 가설을 입증할 수 있는 명백한 증거가 등장한다면 이는 곧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이론인 셈이 된다. 그러니까 신이란, 정말로 우주라는 가상공간에서 인류의 삶을 플레이하는 플레이어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곳이 정말 신의 놀이 속이라는 가정을 한 번 해보자. 그러니까 우리가 사는 이 지구가, 혹은 이 우주가 신이 구동하는 시뮬레이션 게임 속이라면 어떨까. 우리가 ‘신’이라고 부를 법한 창조주가 정말로 우리를 프로그래밍 한 것이라면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의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이 옳을까.

▲게임 <심즈4>의 한 장면 (제공=EA)

 

심즈 속의 심들은 정말 우리의 삶과 마찬가지로 서로 관계 맺기를 원하고, 안정과 포용을 바라며, 기쁨과 슬픔을 느끼고 감정을 교류한다. 심즈 속 캐릭터들의 모습이 플레이어인 우리와 비슷한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것처럼, 어쩌면 우리를 창조한 신의 모습 역시 우리와 닮아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들 역시 인간 개체가 다양한 만큼, 어쩌면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그 이상으로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장애를 가진 신, 다양한 피부색을 지닌 신, 성소수자인 신, 신들의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신을 상상할 수 있는가. 인간의 다양함이 신의 다양함을 닮아 있다면, 정상성의 틀 밖에서 규정되어 살아가는 타자를 배제하고 배척하는 일은 결국 신의 세계를 배척하는 일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모습이 신의 모습과 비슷하다면, 우리가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수용하지 못하는 것은 얼마나 무의미하고 또 우스운 일인가. 창조주의 모습을 인정하지 못하는 피조물들이란 어떤 신화에서도 어리석게 묘사되기 마련이다. 신들은 우리를 플레이하며 정말로 웃고 있을지도 모른다. 한평생 서로 손가락질 하며 살아가는, 몇백 억 광년의 우주 속에서 고작 백 년도 살지 못하는 이 숱한 인간 캐릭터들을 들여다보며 말이다.

 

김선오
2020년 시집 <나이트 사커>를 통해 등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