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게시물은 ‘전통예술과 문화다양성’을 주제로 외부 전문가가 개인적 견해를 바탕으로 작성한 칼럼입니다.
바야흐로 ‘창극의 시대’다. 정년이(남인우 연출)와 살로메(김시화 연출)가 연일 매진을 기록했다. 두 작품엔 공통점이 있다. 정년이는 ‘여성국극’이 소재고, 살로메는 ‘남성창극’을 표방했다. 둘 다 여성 연출의 작품으로, 젠더의식이 깔려있다.
(좌)<남성창극 살로메>,(우)<정년이>(제공=한국문화예술위원회, 국립극장)
두 작품은 또한 넓게 보면 동아시아 음악극의 맥락 속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한국, 중국, 일본의 전통극에선 무대에서 성 역할이 바뀐다. 중국의 경극(京劇)과 일본의 가부키(歌舞技)는 남성이 여성 역할을 하고, 일본의 다카라즈카(寶塚)와 한국의 여성국극은 여성이 남성 역할을 맡아서 크게 인기를 끌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정년이’와 ‘살로메’는 확실히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은 작품이 분명하다. 동아시아 음악극에서 성 역할을 바꾼 배우를 보는 재미와 함께, 동아시아의 음악극의 젠더와 연관해서 동시대적인 의미까지를 둘 다 잘 담아냈다. 두 작품 모두 서구의 음악극과 확실한 변별성을 지닌 작품이야말로, 앞으로 ‘창극의 세계화’를 실현할 작품이다.
특히 남성창극 ‘살로메’가 해외극장에 오른다면, 외국청중의 관심은 대단할 거다. 살로메를 소재로 한 작품은 그간 무수히 많았어도, ‘창극’으로 만들어진 살로메는 처음이거니와 살로메를 ‘남성’ 배우가 연기한다는 건, 두 개의 커다란 매력적인 궁금증이다.
앞으로 창극이 세계무대에서 환영받을 건 분명하다. 그렇다고 어떤 작품이든 나가서 성공한다면 오산이다. 세계무대에서 당당히 인기를 끌 창극은 어떤 작품일까? 두 가지 조건을 갖춰줘야 한다. 첫째는 창(唱). 창극(唱劇)이란 장르의 본질은 무언가? 창극은 말 그대로 창(唱), 곧 한국의 ‘판소리’를 기본으로 만들어졌다. 따라서 판소리의 매력을 잘 살려내야 한다. 둘째는 극(劇). 서구의 일반적인 극양식과 창극이 어떻게 다른가를 확실하게 보여줘야 한다. 동아시아음악극의 특성을 극의 구조에서 살려내야 한다. 이런 걸 두루 꿰뚫을 수 있는 국내 연출가의 출현을 고대한다.
창극이 창(唱)으로서 성공하기 위해선, 역설적이지만 아직은 창의 비중이 높지 않아야 한다. 송스루(sung-through) 창극은 아직은 무리다. 현재의 작창(作唱)은 아직 그 수준에 도달하진 못했다. 적잖은 작창가(作唱歌)가 존재하지만, 아직은 전통판소리를 뛰어넘지 못한다.
요즘 만들어진 창극을 볼 때, ‘극(劇)을 잡는 창(唱)’ 장면이 안타깝다. 극(이야기)은 앞으로 나아가려 하는데, 창(노래)이 극의 진행을 붙잡고 있다고나 할까? 이런 창극일수록 창에 대한 만족도는 높아질 수가 없다. 극의 구조 속에서 창이 적재적소에 빛나야 한다.
창극의 세계화를 위해선, 지금의 단계는 무얼 해야 하나? 그간 창극의 붐업에 큰 역할을 연출가와 작창가에 대해서 이제 좀 냉정해져야 한다.
창극은 창(唱)과 극(劇)의 밸런스가 중요하다. 작창(作唱)과 작곡(作曲)의 범주 안에서, 스토리(대사)와 스타일(연기)이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뤄야 한다. 해외공연작품에선 특히 지나치게 유모 코드를 지양해야 한다. 한국사회에서 통하는 유모가 오히려 외국 청중에게는 소외감을 주고, 작품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그렇다고 무조건 서구인들에게 익숙한 소재가 먹힌다는 건 큰 오산이다. 독특한 설정은 살아있어도, 작품 속에는 궁극적으로 인류의 보편적 사랑을 지향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나는 창극 '산불' (차범석 원작, 이성열 연출)이 '베니스의 상인들'(세익스피어 희곡, 이성렬 연출)보다 오히려 더 큰 관심이 대상이 된다고 역설하겠다. 동서고금의 무대공연 중 성공한 작품 중엔 ‘전쟁과 사랑’ 이야기가 잘 녹여낸 작품이 많다.
2017년 공연된 국립창극단 '산불' 프레스콜 모습 (제공=국립극장)
창극은 아직 연출, 작곡, 작창에서 아쉬움이 있지만, 이런 한계를 창극배우가 한 방에 날려준다. 외국이나 이웃 나라의 국립단체의 배우와 비교할 때, 이렇게 훌륭한 배우를 많이 보유하고 있는 단체는 국립창극단일 뿐이라 생각한다. 국립창극단의 단원은 각자 모두 명배우다.
요즘 민간에서 활동하고 소극장 창극에서도 숨어있는 보석같은 훌륭한 배우를 만날 수 있다. 특별히 내가 주목하는 6인은 이렇다.
정보권과 김율희는 가히 재야의 고수다. ‘패왕별희’와 정보권과 ‘괴물’의 김율희를 보고 있노라면, 두 사람은 대체 불가임을 확인한다. 앞으로 새로운 창극의 주인공으로 누가 될까? 김가을과 윤제원이 우선 순위다. 둘 다, 인물 연기 노래라는 배우의 삼박자를 두루 갖췄다.
(좌)<두아:유월의 눈>에 출연하는 소리꾼 김가을, 정보권 ⓒ타루
(우)<남성창극 살로메>에 출연한 윤제권ⓒ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극도 극일진대, 주인공만으로 작품은 이뤄질 수 없는 게 아닌가? 창극에도 윤여정같은 배우, 송강호같은 배우가 잠재하고 있다. 송보라는 훗날 윤여정과 같은 여배우로 성장할 듯 하다. 그의 연기 안에서 장인정신같은 것이 뜨겁게 전달된다. 이재현은 무명 시절의 송강호를 보는 것 같다. 연기 안에 늘 자기가 있다. 이재현에게 마동석과 같은 캐릭터와 연기를 주문한다면, 이 또한 충분히 소화해 내지 않을까?
이런 배우들 외에 또 많은 배우가 앞으로 창극을 세계무대에 올릴 날을 기대한다. ‘창극의 세계화’를 속히 현실화하기 위해선, 대한민국 문화부가 중심이 된 정부 차원의 조력이 필요하다. 과거 일본의 가부키와 중국의 경극이 그랬던 것처럼.
윤중강
국악 평론가, 기획자, 연출가
제1회 객석예술평론상(1985년)을 받으며 음악평론가로 데뷔했고, KBS 국악대상에서 출판미디어상 및 대상(2004년)을 받았다. 저서로 '국악이 내게로 왔다' '국악이 바뀌고 있다' '국악을 방송에 담다' 등 다수의 평론집이 있다.